이현우기자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
■ 출연 : 이현우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수뇌부는 물론 백악관 참모들과의 상의도 없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주택 모기지 기간을 30년에서 50년으로 연장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주택 정책은 국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즉흥적으로 이를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리하게 해당 정책을 밀고 나갈 것으로 예상되면서 미국 내 정치권은 물론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일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번 발표가 백악관 내부에서조차 당황스러울 정도로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빌 펄티 연방주택금융청장의 단독 보고를 받은 지 불과 10분 만에 자신의 SNS에 정책을 공개했다. 더욱 논란이 된 것은 그가 올린 사진이었다. 미국에서 처음 30년 모기지 정책을 도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나란히 배치하며, 각각 '30년 모기지'와 '50년 모기지'라는 문구를 넣었다. 그리고 제목은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들'이었다.
뒤늦게 백악관에서 경위를 파악한 결과, 빌 펄티 청장이 트럼프에게 단독 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펄티 청장은 미국 대형 주택 건설업체 펄티 그룹 창업자의 손자로, 트럼프 캠프의 주요 후원자였다. 그는 올해 3월 주택금융청장에 임명된 이후 SNS에 트럼프 찬양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에게 금리 인하 압박성 메시지를 반복해왔던 인물이다.
결국 부동산업자 출신 청장의 단독 보고 하나로 중대한 주택 정책이 결정된 셈이다. 공화당 의원들과 백악관 참모들은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하고 반발했다. 백악관에는 항의 전화가 쏟아져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즉흥적이고 독단적인 정책 발표는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도 전례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번 발표가 최근 공화당의 선거 참패와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한다. '미니 중간선거'로 불린 뉴욕 시장 선거를 비롯한 지자체 선거에서 공화당이 연이어 패배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입지가 크게 좁아진 상황이었다. 특히 트럼프의 정치적 숙적으로 꼽히는 조란 맘다니가 뉴욕 시장에 당선된 것은 큰 충격이었다.
맘다니 시장은 식료품 가격, 집세, 생활비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민생 밀착형 공약으로 승리를 거뒀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된 상황에서 민주당이 민생 정책으로 연승을 거두자, 트럼프는 시선을 돌리고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택 모기지 연장 정책은 그러한 맥락에서 급조된 민생 카드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해당 발표 직후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도 물가 관련 대책을 연달아 내놓았다. 커피와 바나나 같은 생필품 가격을 낮추기 위한 조치가 곧 발표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민생 안정을 위한 정책 패키지를 준비 중이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모기지 정책 발표만큼은 너무 성급하게, 그것도 혼자서 결정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모기지 기간을 20년이나 연장하면 매달 내야 하는 원리금이 크게 줄어들어 부동산 시장이 즉각 반응한다. 하지만 미국 상황은 특수했다. 현재 미국의 주택 모기지 금리는 30년 고정금리 기준 6.25%에 달한다. 코로나19 시기만 해도 2~3% 수준이었던 금리가 불과 2~3년 사이에 2배 이상 급등한 것이다.
높은 금리 때문에 미국 주택시장은 사실상 얼어붙은 상태다. 집을 팔려는 사람들은 매도 후 6%가 넘는 금리로 다시 대출을 받아야 하는 부담 때문에 거래를 꺼린다. 구매자들 역시 높은 이자 부담 때문에 주택 구입을 미루고 있다. 파는 쪽도, 사는 쪽도 움직이지 않는 '동결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기지 기간을 30년에서 50년으로 늘린다 해도 실질적 효과는 미미하다. 금리가 떨어지지 않는 한, 기간 연장만으로는 이자 부담을 충분히 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90세까지 빚만 갚다가 죽으라는 말이냐'는 비판이 SNS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민생을 위한 정책이라던 트럼프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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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이 한 번 꽂힌 정책은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성향을 고려하면, 이번 모기지 정책 역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금리가 대폭 인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이미 제롬 파월 연준 의장에게 지속적으로 금리 인하 압박을 가해왔다. 파월 의장의 임기가 내년 5월까지인 만큼, 이후 신임 의장이 취임하면 트럼프의 요구에 따라 금리가 급격히 인하될 가능성이 있다.
경제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시나리오다. 금리가 급격히 하락하고 모기지 기간이 50년으로 확대되면, 주택 투기 심리가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낮은 월 상환액에 현혹되어 과도한 빚을 내 주택을 구매하는 '영끌' 현상이 미국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경기 전망이다. 현재 미국 주식시장을 비롯한 자산시장은 상당히 과열된 상태다. 이미 고점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많아 내년에는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만약 주택시장이 일시적으로 과열됐다가 경기 조정기에 폭락한다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신용도가 낮은 차입자들에게 무분별하게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들이 원리금을 갚지 못하면서 금융시스템 전체가 붕괴 위기에 처했던 악몽이다. 50년 모기지가 낮은 금리와 결합되면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장기간에 걸쳐 빚을 갚아야 하는 부담은 경기 침체기에 대량 채무불이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 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파에서도 '잘못된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공화당 의원들은 당 지도부와의 협의 없이 중대한 정책이 발표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주택 정책은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만큼, 충분한 검토와 당내 합의가 필요했다는 지적이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이번 정책 실패는 공화당에 큰 부담이다. 만약 모기지 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거나 오히려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입지는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선거 결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인인 만큼, 여론이 악화되면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