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배우 신현빈
배우 신현빈이 얼굴을 지웠다. 영화 '얼굴'에서 정영희를 연기하며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외모 때문에 차별받는 여성을 그리면서, 역설적으로 외모에 의존하지 않는 연기를 완성했다. "얼굴이 안 나온다는 게 어렵고 두려운 부분이지만, 이런 기회가 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신현빈에게 이 작품은 제약인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목소리와 몸짓, 그리고 감정의 결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그려내야 하는 전에 없던 도전이었다. 얼굴 없는 배우에게 목소리는 곧 정체성. 어떻게 내야 할지 연상호 감독과 함께 고민했다. 처음엔 듣기에 불편한, 편안하지 않은 목소리를 시도했다. 하지만 촬영 직전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봤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각장애인인) 임영규(박정민)는 청각이 남들보다 예민한데, 더 불편한 소리로 느낄 수 있겠구나. 그럼 이 사람이 좋아할 수 있을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꿨어요. 그렇게 연기하다 보니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변주됐어요. 엄마한테 하는 말투, 친구한테 하는 말투가 다르듯이요. 얼굴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 차이가 도드라지게 나타나더라고요."
영화 '얼굴' 스틸 컷
신현빈은 자세와 걸음걸이로도 정영희의 변화를 표현했다. 여직원들을 추행하는 백주상(임성재) 사장과 갈등을 겪으면서 구부정했던 어깨는 점차 펴지고, 걸음에는 힘이 생긴다.
"구부정한 자세를 일이 고돼서만이 아니라 위축된 마음,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가족에게조차 부정당한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대목부터 자세나 걸음을 조금씩 바꾸었죠. 전보다 더 힘 있게, 더 바로 서려고 했어요."
연기보다 더 공들인 부분이 있다. 정영희의 내면 파악이다. 신현빈은 외모 차별은 물론 임영규에 대한 배신감,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지를 동시에 표현해야 했다.
"정영희와 임영규 모두 자신을 그대로 봐주는 사람을 처음 만나요.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호의를 가지고 대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간절했겠어요. 하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달라요. 임영규는 남들이 정해놓은 것, 남들의 기준을 많이 신경 써요. 정영희는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고요. 그 간극이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정영희는 이 사람마저도 나를 다른 사람들처럼 본다는 사실에 절망이 컸을 거예요. 자기를 유일하게 이해한다고 여겼던 사람이니 감정적으로 크게 무너졌겠죠. '당신도 내가 못생겨서 그러냐'는 대사를 하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영화 '얼굴' 스틸 컷
배역에 대한 이해는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는 제약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정영희라는 인물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우리에게 정영희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바깥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고, 무엇이 옳은 이야기인지 구분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만들어가는 게 인생에서 중요하니까요. 연기도 마찬가지 같아요. 이번 작품으로 '하나의 표현에 제약이 생긴다고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니구나,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가능성을 더 열 수 있구나'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보이지 않는 것이 때로는 가장 깊이 보이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