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주기자
'천연 광천수'를 내세운 프랑스 프리미엄 생수 브랜드들이 정수 과정을 거쳤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파장이 일고있다. 글로벌 생수 업계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브랜드 스캔들이 아닌 기후 위기 현실화의 신호탄으로 규정한다. 천연 샘물 채취 환경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경고다.
26일 프랑스 르몽드와 프랑스앵포 탐사보도에 따르면, 에비앙은 수년간 자외선(UV) 소독과 활성탄 필터 정화를 적용하고도 '천연 광천수'로 판매해왔다. 프랑스 정부가 이를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까지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유럽연합 지침에 따라 '천연 광천수'로 표시하는 제품들은 모두 인위적인 처리 없이 그대로 병에 담겨야 한다. '샘물'이나 '천연 미네랄 워터' 등도 마찬가지며, 이들 천연 생수는 보존된 지하자원에서 추출돼야 하고 소독이 금지된다. 반면, '일반 생수'는 염소 처리나 여과 등 특정 정수 과정이 허용되는데, 에비앙은 '천연 광천수'로 표시하고, 다른 일반 생수와 같이 자외선(UV) 소독 및 활성탄 필터를 거쳐 판매했다는 것이다.
앞서 글로벌 음료기업 네슬레 산하의 페리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정화한 물을 '천연 광천수'로 속여 판매했다는 이유로 소비자 단체에 고발당했다.
천연 샘물은 빗물이나 눈이 지하 암반에 스며들어 오랜 시간 정화된 뒤 솟아나는 물이다. 하지만 가뭄이 길어지면 지하수 보충 속도가 늦어져 샘물의 유량이 줄고, 폭우가 쏟아지면 오염물질이 빠르게 지하로 유입돼 수질이 악화된다. 에비앙의 산지인 프랑스 알프스에서는 빙하 후퇴와 강수 불규칙으로 인해 지하수 보충이 늦어지고, 수원 자체가 압박을 받는다는 연구도 나왔다.
BBC는 "심각해진 지하수 오염이 정화 과정 도입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BBC에 따르면 페리에 수원이 위치한 남부 프랑스 지역에서는 2017년 이후 반복된 가뭄과 기온 상승으로 지하수층의 깊은 암반수까지 오염이 확산되는 현상이 관측됐다는 것. 수문학자 엠마 하지자는 BBC 인터뷰에서 "대형 브랜드들이 스스로 물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건 이미 수질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라며 "기후 변화 시대에 이런 상업 모델은 전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기후 위기는 이미 생수 산업 공급망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세계자원연구소(WRI)에 따르면 2030년까지 전 세계 담수 수요는 공급을 40% 이상 초과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엔환경계획(UNEP) 역시 기후변화로 인한 수질 오염 리스크가 매년 7%씩 증가할 것으로 추산 중이다.
국내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 화산암반수를 기반으로 하는 국내 대표 먹는샘물인 제주삼다수는 최근 제주도의 기후변화와 관광객 급증으로 지하수 수위가 낮아지고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강수 패턴 변화가 장기적 취수 안정성을 흔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강원·충청 등에서는 기후 위기로 가뭄 빈도가 늘자 지역 농업용수와 상업용 생수 채취 간 갈등이 점차 커지고 있다. 해당 지역에서 취수를 하고 있는 롯데칠성음료 아이시스도 취수원 다변화가 시급해진 것이다. 농심 백산수는 백두대간 수원지 기반이지만, 폭우·산사태 등 극단적 기후 사건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수 기업들이 앞으로 더 정교한 수질 모니터링과 살균·정화 공정을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결국 생수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생수 산업은 원수 확보부터 정수 공정, 포장재 처리까지 전 과정에서 기후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며 "기업이 물 관리와 환경 보전을 얼마나 책임 있게 하고 있는지가 앞으로 생수 시장의 신뢰와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