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1965년의 출발은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담대한 결단이었다. 그로부터 60년, 양국은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며 동아시아 산업화를 함께 이끌어온 경제적 동반자가 되었다. 이제는 또 하나의 전환점에 서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일 무역은 수직적 분업에서 수평적 협력 구조로 진화해 왔다. 1965년 2억 달러에 불과하던 양국 간 교역 규모는 2024년 772억 달러로 352배 확대되었고, 반도체·철강·화학·IT 등 고부가가치 품목 중심의 산업 내 교역이 활발해졌다. 특히 한국의 대일 수출에서 중간재 비중은 1988년 32%에서 2024년 78%로 급증하며 공급망 상호의존도가 뚜렷해졌다. 한국은 일본의 정밀기계·소재를, 일본은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양국은 이미 산업 생태계를 공유하고 있다.
기업 차원에서 협력 의지는 분명하다. 무협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94.5%, 일본 기업의 95.9%가 협력 확대에 긍정적이며, '장기 신뢰 기반 거래'와 '상대국 시장 접근'이 주요 이유로 꼽혔다. 협력 유망 분야로는 차세대 반도체, 바이오, 모빌리티, 핵심 광물, 에너지 등이 제시된다. 예컨대 시스템 반도체 설계 역량 강화를 위한 연구개발(R&D) 플랫폼 구축, 중소기업의 제조·설계 연계 생태계 조성, 신약 개발 임상데이터 상호인정(MRA), 교통 데이터 및 결제 시스템의 표준화 등은 실질적 산업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다.
광물 및 에너지 협력도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는 파트너십의 기반이다. 양국 모두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 이상으로 리튬·코발트 등 핵심 광물은 특정국 편중도가 심하다. 일본의 해외 자원개발 노하우와 한국의 에너지 활용 기술을 결합해 제3국 공동진출 모델을 확대한다면 자원안보 강화도 가능하다. 실제로 포스코와 마루베니, 한국가스공사와 제라(JERA), 롯데케미칼과 스미토모상사 등은 이미 칠레,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협력의 지리적 외연도 넓어지고 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도 양국 협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일은 미중 전략경쟁과 보호무역주의 확산 속에서 공급망 재편의 소용돌이에 놓여 있다. 올해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관세 무기화'를 내세우며 자유무역 질서를 무력화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에서 민주주의 가치만으로는 연대를 확대하기 어렵다. 산업 구조, 지정학적 환경, 노동시장 등 여러 측면에서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한일 양국은, 위기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전략적 생존 동맹으로 거듭나야 한다.
한일은 저출산, 고령화, 지방소멸, 디지털 전환 등 유사한 사회 구조적 과제에도 직면해 있다. 이러한 공통 과제는 경제를 넘어 정책, 지역사회, 인구 전략을 아우르는 다층적 협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특히 청년 세대를 축으로 한 인적 교류와 공동 프로젝트는 중장기 협력의 지속성을 높이는 핵심 경로다. 최근 2030 세대의 상호 호감도 상승과 관광·문화 교류 확대는 단기 현상을 넘어 미래 신뢰 형성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세대 간 인식 격차를 좁히고, 생활의 접점에서 협력을 체감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다음 시대를 여는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과거 60년이 한일관계의 '관리'였다면, 앞으로의 60년은 '설계'의 시간이어야 한다. 기술, 안보, 에너지, 가치사슬 등 복합 과제를 풀어내려면, 단편적 협력을 넘어서는 통합적 전략이 필요하다. 이제는 '연(連)'을 넘어 '결(結)'로 나아가야 한다. 위기를 넘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면, 한일은 세계질서의 격랑 속에서도 나란히 설 수 있을 것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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