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에 이어
*장태완은 대통령 모시기가 허사로 돌아간 밤 11시경 남은 장교 약 예순 명을 집결시켰다. 비장한 결의를 표명하고 제30경비단장, 제33경비단장, 헌병단장 등을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제30경비단에서 반란을 모의하는 자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이들에게도 똑같이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김포에 있던 야포단의 모든 포도 경복궁을 조준하라고 했다. "전차를 비롯해 전 병력을 즉시 전투조로 편성하라. 목표는 경복궁의 30경비단과 보안사령부다. 공격개시선은 퇴계로 아스토리아호텔 앞이다. 즉시 공격 개시 선상으로 모든 부대를 전개하라. 출발은 내가 선도한다. 중앙청 부근에 적절한 진지를 마련한 다음 전차포, 토우(대전차 미사일), 106㎜ 무반동총, 3.5인치 로켓포로 양 목표에 집중적으로 사격한다. 포탄 수백 발을 쏜 뒤 일제히 돌격을 감행해 역모자들을 사살 또는 포획하고 반란을 진압한다."
*옆에서 듣던 윤성민 참모총장은 최후로 제1, 제2, 제3군 사령관에게 병력 출동 협조를 구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이건영 제3군 사령관과 전화로 통화했다. 대화 내용이 석연치 않음을 직감한 장태완은 송수화기를 받아들고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출동 여부를 물었다. 이건영 장군은 "지금 야전군 부대를 동원하면 김일성의 남침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는 형편 아닌가? 그리고 부대 출동은 상부 허락이 떨어져야 할 것 아냐"라며 난감해했다. 윤성민 참모총장은 김학원 제1군사령관, 진동채 제2군사령관과도 통화했다. 결과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설사 요청을 수락했다 하더라도 거리·시간상 적절하지 않았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육본 출동을 지시받은 제9공수여단은 밤 11시 30분이 지나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병력을 수송할 차량이 없었다. 한 대대가 충남 서산으로 야외훈련을 나가 있었다. 윤흥기 제9공수여단장이 5분 대기조인 제5대대 병력을 이끌고 부대 정문을 나섰을 때 출동 병력을 돌리라는 전화도 빗발쳤다. 윤 여단장은 무슨 일인지 몰라 정 특전사령관에게 무전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시각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이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정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고 여단 병력을 이끌고 사령부를 공격 중이었기 때문이다. 윤 여단장은 결국 대기시켜 놓았던 병력을 모두 부대로 복귀시켰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제9공수여단 병력이 출동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합수본부 측 장군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앞서 그가 쌍방에서 병력을 동원하면 수많은 희생자가 나고 서울이 불바다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로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장태완은 여기저기 계속 병력지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걸었다. 애초 협조를 약속했던 지휘관들은 상부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곤란해했다. 아예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한 지휘관도 있었다.
*합수본부 측은 제9공수여단 출동을 막기 전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에게 병력 출동을 지시했다. 제1공수여단은 합수본부 측 장군들에 대한 체포 지시가 내려진 상태라서 제2한강교를 도강할 수 없었다. 박 여단장은 모든 한강 다리가 수경사 헌병들에게 막혀 있어 수경사 관할이 아닌 행주대교를 택했다.
*수경사 야포단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하기 4개월 전인 7월 1일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창설시켰다. 무장세력의 청와대 기습위험이 있다는 이유였다. 경호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155㎜·105㎜ 곡사포와 병력 1500여 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장태완은 행주대교에 근접한 구명회 야포단장으로부터 박희도 여단장이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진입한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는 현 위치에서 모든 포를 경복궁 30경비사단에 조준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이에 구 단장은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령관님 명령이니까 모든 포를 경복궁에 조준하겠지만, 포격은 어려워. 박 대령도 잘 알고 있겠지만 야포는 피아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시가전에선 무용지물 아닌가. 더구나 30경비단을 목표로 표적 사격하려면 우선 관측사격이 이뤄져야 해. 그렇게 하면 광화문 일대가 쑥밭이 되고 민간인의 피해가 말할 수 없을 만큼 클 거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포격은 절대 안 되니 대신 조명탄이나 준비해둘게."
*최세창 제3공수 여단장은 특전사령부 인근에 있는 제3공수여단 예하 제15대대장 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박 중령은 M16 소총으로 무장한 공수 대원 열 명을 이끌고 특전사령부로 진입했다. 이들은 건물 1층으로 들어서면서 사령관실이 있는 2층을 향해 약 스무 발의 위협 사격을 가했다. 신속하게 사령관 집무실까지 들어갔으나 내실로 통하는 문은 굳게 안으로 잠겨 있었다. 박 중령은 문고리에 총을 쏴서 시건 장치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대원 한 명이 M16 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자 안에서 몇 탄의 총알이 날아왔다. 팔등 등을 다친 특공대원들은 다시 집중사격을 가했다. 더 이상 안에서 총알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 틈을 타 특공대원들은 문을 밀어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김오랑 소령이 쓰러져 있었다. 특공대원들은 내실 문고리에도 집중사격을 가했다. 그 안에서도 권총 소리가 한번 났으나 곧 조용해졌다. 박 중령이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보니 정병주 사령관이 왼팔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그는 정 사령관을 일으켜 세우고 밖으로 끌고 나와 현관 앞에 대기한 지프차에 태웠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김오랑 소령은 그대로 내버려 뒀다.
*김오랑 소령이 쓰러져 있다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현장으로 달려간 사람은 그의 부관 장범주 대위였다. 손을 잡아보니 맥박이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장 대위는 지프차를 불러 김 소령을 사령부 의무대로 옮겼다. 군의관은 출혈이 너무 심해 살 가망이 없다고 했다. 김 소령은 끝내 사망했다.
*김오랑 소령은 박종규 중령과 육사 선후배 관계였다. 영내 관사 아파트에 살며 가족 간 내왕도 잦은 편이었다.
*김오랑 소령이 죽은 뒤 그의 부인은 충격과 실의를 딛기 위해 사회봉사 활동했다. 1990년에는 12·12 군사반란 주도 인물들을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러나 갑작스레 소송을 포기해 외압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이듬해 6월 그는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비원 건물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서빙고분실로 연행됐으나 출혈이 심해 보안사 본청에 있는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뒤늦게 김오랑 소령이 숨졌다는 사실을 들었다. 정 특전사령관은 1980년 1월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예편 원서를 쓰고 육군 소장으로 31년간 군 생활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는 장태완을 만나 자기가 가장 아끼던 여단장 세 명에게 배반당한 것이 가슴 아프다고 토로했다. "최세창, 박희도, 장기오 모두 승진·보직에서 내 은혜를 입었던 부하였는데, 그들이 날 그렇게 배반할 줄 몰랐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걸 그때 실감했어."
*정병주 장군은 부하들의 배반을 참지 못해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1988년 10월 중순 평소처럼 집을 나갔다가 소식이 끊겼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989년 3월 초 타계했다. 경기도 어느 군부대 빈 숙영지에서 목을 매 숨졌다. 주위에서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장태완은 중앙정보부장 서리 이희성 장군 등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투용 지프차에 올라탔다. 최후의 돌진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수경사 정문 입구에서 아스토리아 호텔 쪽으로 도로를 따라 병력을 태운 트럭과 토우 중대, 전차 네 대가 차례로 늘어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에 탑승해 있는 병력은 약 100명. 행정병과 수송부 요원, 취사병까지 끌어모았다. 장태완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전차 네 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밀고 들어가 보안사 건물과 30경비단에 전차포, 106㎜ 무반동총, 토우, 3.5인치 로켓포를 집중적으로 퍼붓고 병력을 투입해 쿠데타 주모자들을 체포 또는 사살할 계획이었다. 내가 사살되더라도 군과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었다. 북악산에 배치된 경계용 헬기를 동원해 보안사와 30경비단에 최루탄과 수류탄을 투하하는 방법도 검토했다. 하지만 헬기부대장이 밤이라 건물 접근이 어렵다고 해 취소했다."
*장태완은 일부 참모들의 반대에도 토우 중대 동원을 지시했다. 육탄공격을 각오한 마당에 가능한 모든 화력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지프차에서 내린 그는 후미에 있는 병력대열에서부터 전투 임무 숙지 상태와 장비를 점검하며 선두로 나아갔다. 이때 그보다 먼저 대열을 확인했던 비서실장 김수탁 중령이 헐레벌떡 뛰어와 말을 전했다. "사령관님! 제가 지금 저 앞의 전차 소대 쪽에 갔더니 30경비단 편에 있는 전차대대 본부에서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셔서 사령부로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최후 공격 주력이 바로 저 전차 네 대뿐인데, 나머지 이 행정병력만 가지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모든 것은 다 끝이 난 것 같습니다." 장태완은 고민 끝에 집무실로 돌아갔다. 이때가 12월 12일 새벽 1시 30분경이었다. 그는 곧 충격적인 두 가지 소식을 접했다. 하나는 제1공수여단이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이 제3공수여단 부하 장병들 손에 체포되고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총격전에서 전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장태완이 최후 돌격을 포기하고 집무실로 돌아갔을 때 그렇게 찾았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12월 13일 새벽 3시경이었다. 그는 "야, 장태완! 넌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냐!"라며 "말로 해! 말로. 말로 하란 말이야.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단 말이야"라고 했다. 이어 병력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장태완은 "그것이 장관님 명령이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상황을 끝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장태완은 이내 전투행위 및 사격 중지를 지시했다. 아울러 전 한강 교량상의 바리케이드를 새벽 4시 통금 해제 시간에 맞춰 철거해 통행을 정상화하라고 명령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에게 장태완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조 대령은 수경사에 남아 있는 신윤희 중령에게 장태완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신 중령은 장태완 지시로 병력을 이끌고 총장공관으로 긴급출동까지 했던 장교다. 상황 초기에는 정식 지휘계통 지시에 충실히 따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합수본부 측에 설득돼 이제는 자기 직속 지휘관을 체포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한영수 대위, 윤태이 대위, 박대식 대위 등을 불러 모아 작전 요지를 하달했다.
*신윤희 중령은 새벽 3시 40분경 헌병중대장과 대원 열 명을 이끌고 2층 사령관실 복도로 올라왔다. 이때 사령관실 부속실에는 육본 참모들의 수행 부관 열 명 정도가 모여 서성대고 있었다. 신 중령은 모두 나가 있으라고 위협하고는 수행 부관들이 차고 있던 권총을 빼앗았다. 헌병들은 망연하게 앉아 있던 장군들을 향해 M16 총구를 겨누었다. 이때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집무실로 들어가려다 자기에게 총구를 겨누는 헌병을 보고 놀라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에 손을 가져갔다. 순간 M16 총성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하 소장의 몸에서 피가 쏟아졌다. 총알이 왼 가슴을 뚫고 허파와 비장을 스친 뒤 등 뒤로 관통했다. 이를 목격한 정승화 총장의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은 재빠르게 권총을 뽑아 들어 헌병들을 겨누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이 황 대령의 팔을 잡아 내렸다. 이내 헌병들을 향해 "야, 이놈들아! 우리는 비무장이야. 당장 총구를 치우지 못해"라고 소리쳤다.
*장태완은 피를 흘리고 쓰러진 하소곤 장군을 확인하고는 부하들에게 빨리 병원으로 모셔가라고 지시했다. 그는 집무실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신윤희 중령을 마주했다. 장태완은 "누구의 명령이야? 부단장은 도대체 누구의 명령을 받게 돼 있나?"라고 물었다. 신 중령은 "보안사령관님 명령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사령관님을 모시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장태완은 "나쁜 놈 같으니, 좋다! 전두환이한테 가자"라고 말하고는 아래층 현관 앞에 대기한 차에 올라탔다. 12월 13일 새벽 4시경 일이었다.
*장태완이 서빙고로 연행되고 수경사령관실의 육본 참모들은 아침까지 연금당했다. 문홍구 중장과 윤성민 참모차장만 서빙고로 끌려가고 나머지 참모들은 육본으로 돌아갔다. 제3군사령관 이건영 장군도 이날 새벽 국방부로 들어오라는 노재현 장관의 지시를 받고 아침에 움직였다가 바로 서빙고로 연행됐다.
*군권을 장악한 이들은 군 수뇌급부터 물갈이했다. 중앙정보부장 서리인 육사 8기 이희성 중장은 대장으로 승진해 정승화 장군 후임으로 육군 참모총장이 됐다. 전두환은 평소 그를 껄끄럽게 여겼다. 하지만 그날 밤 반란군 측에 동조한 대가를 잊지 않았다. 애초 전두환 그룹에서 차기 참모총장으로 지목된 인물은 제1군단장 황영시 장군이었다. 이날 참모차장으로 임명됐다.
*쿠데타 핵심 인물이던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장군은 제3군사령관, 제9사단 노태우 장군은 장태완의 후임 수도경비사령관, 제50사단 정호용 장군은 특전사령관, 제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은 제9사단장으로 각각 임명됐다. 장관에는 육군을 잘 모르는 전 공군 참모총장 주영복 장군이 임명됐다. 장태완은 "육군을 잘 모르는 사람을 앉혀 놓아야 활용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희성 장군의 참모총장 취임으로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겸직하려 했다. 이희성 참모장과 신현확 국무총리는 반대했다. 일국의 중요 정보기관들을 한 사람이 겸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자기 뜻을 관철했다.
*장태완은 서빙고에서 사복 차림의 보안사 요원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5~7평 남짓한 안에는 아직 비닐을 채 벗기지 않은 보르네오 티크제 싱글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조그마한 철제 책상에 마주 바라보고 앉을 수 있게 철제 의자 두 개도 놓여 있었다. 화장실에는 샤워기와 양변기, 조그마한 욕조가 갖춰져 있었다. 장태완은 '아, 여기가 그 악명높은 '빙고 호텔'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수사관은 세탁도 제대로 하지 않은 허름한 작업복을 갖다 놓고 입으라 했다. 단추도 몇 개밖에 붙어 있지 않고 허리띠도 없는 옷이었다.
*장태완은 감방 쇠창살을 통해 아들이 다니고 있는 중경고교 교사(校舍)를 봤다. '아들놈은 지금 아비가 반란 무리를 치다가 역적이 돼 이곳에 갇힌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입시 공부에 열중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수사관은 장태완에게 "바로 옆방에 김재규, 정승화 총장님도 계십니다"라고 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청와대 경비를 강화하려고 수도경비사령관에서 엄선한 장병들로 33대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했다. 부대원들은 경호실에 파견돼 있다가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에 배속됐다. 보안사령부 경비와 김재규 사건 관련자들의 가정 통제 및 동향 파악을 책임졌다. 서빙고 분실에서 근무한 경비병들은 엄밀히 말하면 장태완의 부하들이었다.
*장태완은 1980년 2월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수사관을 불러 그렇게 하겠지만 전두환 장군을 만나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2월 5일 오후 4시경 전두환이 찾아왔다. 장태완은 2층에 있는 서빙고 분실장실로 올라갔다. 자리에는 합수본부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도 있었다. 장태완이 면담실로 들어서자 전두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부터 잡았다. "장 선배! 그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건강은 어떻습니까?"
*다음은 장태완이 기술한 그와 전두환의 대화다. "나야 이래저래 죽을 놈인데 건강 같은 것이 문제겠소? 그런데 전 장군! 나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오?" "실인즉, 정승화 장군이 김재규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도 조사에 불응해서 군 발전을 위해 건전한 뜻을 가진 황영시 장군, 차규헌 장군 그리고 유학성 장군을 모시고 정 총장님께 가서 총장직을 내놓고 약 6개월 정도 댁에서 쉬고 계시면 대사나 장관 또는 그보다 더한 자리를 보장해 드릴 것을 설득하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이 세분들이 정 총장님의 위압에 눌려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설득의 명수인 노태우 장군을 함께 보내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총장님께서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그 내용이 장 선배에게 전달돼 사건이 그렇게 확대된 겁니다. 장 선배가 한강 교량을 막는 바람에 지금 금값이 얼마인 줄 압니까? 3만 원 하던 것이 7만 원으로 뛰었고, 국제여론도 아주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왜 내게 사전에 협조도 구하지 않았소? 아니면 그날 밤 연희동 요정으로 우릴 초대했었는데 그 자리에서 우릴 연금시킬 수도 있었던 일이 아니오? 그 주연 장소에 당신네 부대원들을 위장 배치해 놓았다가 얼마든지 우릴 처치할 수 있지 않았소. 그런데도 내가 내 발로 내가 지휘할 수도 있는 부대로 갈 수 있도록 놔두었으니 나로서는 의당 죽기 전까지는 내 기본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오. 그리고 총장님을 연행해 갔다는 사실을 왜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았소?" "장 선배님! 사실은 밑에 사람들이 장 선배를 사전에 연금시키자는 것을 내가 야단을 쳤어요. 그 어른은 우리가 모시고 큰일을 함께 할 분인데 그렇게 하면 되겠나? 하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던 것인데 그만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입장이 난처했는지 모릅니다. 장 선배가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는 다음날 장 선배를 중장으로 진급시켜서 군단장으로 내보내려고 했던 겁니다.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을 이해하시고 집에 가셔서 약 6개월 동안 쉬고 계시면 저희가 일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군인이 군 생활을 마치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일자리는 무슨 일자리요? 그런데 정 총장님은 꼭 재판에 회부해서 형을 줄 생각이요?" "장 선배님! 그동안 돌아가고 있는 사정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시는데 지금 국내외적으로 정 총장님에 대한 여론이 아주 나쁩니다. 그런데 장 선배는 왜 그런 것도 모르고 계세요." "자, 이제 그만해 둡시다. 모든 것은 끝났소. 승부는 깨끗하게 합시다. 이 패장을 죽이지 않고 집으로 내보내 준다니 나가야지!" 장태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감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사관이 부르는 대로 예편서를 작성했다. '일신상의 사유로 인하여 예편을 상신합니다.'
*장태완은 2개월 전 연행돼 올 때 입었던 소장 계급장의 군복(권총만 제외)으로 갈아입고 착잡한 심정으로 감방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1980년 2월 4일 오후 5시경 일이었다. 가족들은 울음으로 맞아줬다.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장태완의 아들은 1982년 1월 12일 외출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2월 4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장태완은 아들을 용인 공원묘지에 묻고 며칠이 지난 2월 15일 이한동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을 만났다. 이 실장은 집안에 그냥 있으면 속만 상한다고 조언했다. 직장에 나가 근무하며 슬픔을 잊고 집안일도 수습하라고 권했다. 장태완은 그게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해 수락했다. 이 실장이 주선한 자리는 막 새로 설립된 한국증권전산 사장직이었다. 증권회사의 전산 업무를 처리하는 조그만 용역회사였다. 증권거래소 자회사로 창설돼 각 증권회사의 전산 업무를 공동 처리했다. 사원 규모는 상무 한 명, 부장 두 명, 일반직원 여든두 명이었다. 이 회사는 1986년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따라 증권회사 스물다섯 곳의 공동 전산처리 용역을 위한 순수 민간 용역회사로 전환됐다.
*훗날 12·12 군사반란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열다섯 명이다. 2005년 '신동아' 보도에 따르면 육사 11기에서 18기까지 하나회에 속한 멤버는 여든다섯 명이다. 다수는 5공화국에서 행정 관료나 민정당 국회의원이 됐다. 남은 자들은 군부 내 요직을 차지했다.
*다음은 노태우 당시 제9사단장의 회고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정승화 총장이 시해 사건과 관련해 자신도 조사받을 테니 수사관을 보내 달라고 해서 보냈더니 진술 내용을 몇 번이나 번복하는가 하면 조사가 끝나 합수부에 넘어온 진술서를 다시 가져오라고 해서 고치는 등 심리적으로 불안정해 보인다고 했다. 전 본부장은 자신의 비서실장인 허화평 대령을 불러 그간의 수사 과정을 내게 브리핑하게 했다. 듣고 보니 그냥 넘길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합동수사본부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관련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중히 조사해 국민 앞에 그 진상을 낱낱이 밝혀야 했다. (…) 정 총장과 친분이 두터운 황영시 제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같은 분들을 모셔다 수사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수사상 애로점과 우리들의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전 장군에게 말했다. '정 총장이 사전에 내용을 몰랐다 하더라도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 사건 현장 가까이 있던 중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도의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조사받기에 앞서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는 게 우리가 존경해온 정 총장이 취해야 할 자세라고 본다. 정 총장이 능히 그럴 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진심을 말씀드리면 받아들이지 않겠나.' 나는 또 '군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합참의장으로 올라가시게 하는 방법도 어려움을 푸는 실마리가 되지 않겠느냐'라는 이야기도 했다. 전 장군은 내 말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12월 12일 그분들을 모셔다 그렇게 일이 풀리도록 협조를 구하자'고 했다. 우리는 12월 12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 12월 12일 오후 나는 군단에 들러 황영시 장군을 모시고 보안사로 향했다. 보안사 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안내 장교가 '30경비단장실로 가시면 된다'며 앞장섰다. (…) 왜 이렇게 많이 모였는지 이유를 물으니 정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세력이나 불만을 가진 수도권 지역 장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나와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장군은 '정 총장을 설득하고 다른 사람들을 상황에 맞춰 설득해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도록 보안사에서 사전에 협조를 요청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연행'이라는 표현을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그 전부터 나는 '모셔 온다'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합동수사본부 입장에서는 그런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장세동 30경비단장의 보고에 따르면 총장공관에서 충돌이 생겨 사상자가 발생하고 정 총장은 서빙고로 연행됐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본부장은 정 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이 동의해야만 재가를 하겠다는 것이 최규하 대통령의 완고한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행방불명이라는 보고였다. 사태가 이렇게 확대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앉아서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저녁 8시가 조금 지나서였던 것 같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총장을 즉각 원대 복귀시켜라.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장성 놈들은 모두 반란군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 장 장군은 이성을 잃은 듯했다. 나는 큰 낭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군의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선배 장군들에게 이에 역점을 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이희성 장군은 사태가 악화하는 걸 막기 위해 많이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장군은 유학성 장군, 장세동 단장 등과 전화로 통화하면서 군의 충돌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장 장군은 전차부대를 동원해 30경비단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서울의 주요 길목을 장악하고, 병력 이동을 통제하게 하고, 심지어 포병까지 동원해 105㎜ 포를 경복궁으로 향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포를 발사하면 경복궁뿐만 아니라 청와대, 총리공관 모두가 낙탄 지역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측 병력은 30경비단밖에 없었다. 장 장군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촉즉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충돌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때 9공수여단이 육본 측의 명령에 따라 서울로 출동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윤흥기 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출동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윤 여단장은 출동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언질은 하지 않았지만 내 말은 이해하는 것 같았다. 장 장군의 부하들에 대한 공격 독촉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그 시점에 이르러 나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저들이 30경비단을 점령해 단장실로 쳐들어온다면 일전이 불가피하다. 그 경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과 싸워야 하는가. 나는 '아니다. 결코 우리 병사들과 총을 겨누고 싸울 수는 없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권총에 장전된 탄알을 확인하고 '그들과 부딪치기 직전에 스스로 자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곧바로 '이것은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라는 큰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드디어 수경사 지휘부를 제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했는데 그 과정에서 하소곤 작전참모부장이 부상했다고 했다. 나는 내가 출동시킨 부대에서는 충돌이 없길 바랐다. 얼마 뒤 내가 동원한 병력이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중앙청에 진입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큰 고비를 넘기고 우려했던 유혈사태는 막은 셈이었다. (…) 이것이 내가 겪은 12·12 사태의 전모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12·12 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일어난 돌발 사고였다. 만일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상 어느 쿠데타도 병력을 동원하는 부대장이 부대를 이탈해 지휘할 수 없는 곳에 가 있은 예가 없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 장태완 지음·발행처 명성출판사 '12·12 쿠데타와 나(1993)', 한국일보 정치부 지음·발행처 한국일보사 '빼앗긴 서울의 봄(1994)', 고나무 지음·발행처 북콤마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2013)', 노태우 지음·발행처 조선뉴스프레스 '노태우 회고록(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2011)', 정일영·황동하 지음·발행처 그림씨 '전두환 타서전(2017)', 정해구 지음·발행처 역사문제연구소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2011)'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