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송승섭기자
국내 수입기업 사이에서 외국 농산물을 들여오지 않으려는 '수입농산물 기피'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관세청의 페루산 녹두수입 기업에 대한 조사가 장기화한 데다 추징금액도 막대하기 때문이다. 관세청이 요구하는 서류를 내지 못하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해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결국 피해는 비싼 가격에 농산물을 수입해야 하는 소비자에게 전가될 거라는 주장도 나온다.
3일 아시아경제 취재에 따르면 해외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농산물 수입은 주로 관세가 없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과 이뤄지는데, 수입기업의 의무 중 하나인 ‘원산지 증빙’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관세청은 현재 페루산 녹두의 원산지를 확인하기 위해 은행계좌내역, 송금내역, 회계장부, 세무보고서, 재배명세서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 수입기업 관계자는 “앞으로 한국이 다른 국가와 새로운 FTA를 체결한다고 해도 농산물은 쳐다보지 말라는 분위기”라면서 “관세청의 수준에 맞추지 못하면 기업이 파산하게 되는데 그렇게 위험한 사업을 누가 하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수입기업 관계자도 “이번 사태가 잘 마무리 지어진다고 해도 농산물 수입은 어려울 것 같다”며 “수입을 한다고 죄는 아닌데 농산물은 리스크가 지나치게 큰 것 같다”고 얘기했다.
관세청뿐 아니라 정치권의 압박도 농산물 수입을 꺼리는 부담요인 중 하나다. 특정 농산물을 값싸게 들여오면, 국내 농민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 지난해 10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도 수입기업들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전남을 지역구로 둔 서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페루산 녹두 수입량이 64배 폭증하는데도 농식품부가 대응하지 않아 녹두농가들이 막대한 피해를 봤다”며 “FTA로 인한 농업 피해 지원도 충분하지 않은데 사후 대책마저 없어 농민 피해가 더 크다”고 주장했다.
수입기업 대표들은 관세청의 조사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밀수의혹’에 시달리는 게 가장 억울하다고 토로한다. 한 수입기업 대표는 “원산지 증빙을 위한 자료들을 꼼꼼히 챙겨왔는데 관세청이 이렇게 까다로운 자료를 요구할 줄은 몰랐다”면서 “내 눈으로 페루의 녹두를 봤는데 내가 밀수범으로 몰린 꼴”이라고 자조했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의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 쌀을 제외하면 대다수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곡물 수입규모는 세계에서 7번째로 크다. FTA 발효에도 불구하고 수입기업들의 농산물 공급이 저조하면, 국내 소비자들은 비싼 가격에 농산물을 구매해야 한다. 페루산 녹두의 경우 99%가 한국으로 들어오는데, 수출량은 2021년 8643톤에서 관세청 조사 착수 후 2022년 2500톤으로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