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담(手談)]바둑의 ‘패’에 얽힌 인생사

눈앞의 이익 때문에 지불한 인생의 수업료
그렇게 해서 나설 때 참을 때 구별 배운다면
인생의 진정한 승부사로 거듭날 수도

‘패, 꽃놀이패, 천지대패, 만패불청….’

어디에선가 한 번쯤 들어본 것 같은 바둑 용어 ‘패(覇)’.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천지대패나 만패불청은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나마 꽃놀이패는 상대적으로 익숙하다. 뭔가 좋은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상에서 많이 쓰인다. 그렇다면 패의 의미는 무엇일까. 패는 바둑판 특정 지점에서 따내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한 곳을 연달아 두지 못하게 한 룰이다.

예를 들어 흑돌과 백돌이 서로 단수 상황일 때 자기가 상대 돌을 따고, 곧바로 상대가 다시 따는 장면이 허용된다면 바둑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곳을 한 번 두고 돌아와야 문제의 돌을 다시 따낼 기회를 주는 패라는 룰이 생겼다.

패는 기본적으로 평등하다. 흑돌에 기회를 주고 나면 백돌에도 기회가 돌아가는 구조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평등하지 않은 승부다. 팻감이 많은 대국자는 승패를 뒤집는 반전의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 반면 팻감이 부족한 사람은 형세가 아무리 좋아도 뒤가 서늘하다. 언제 상대가 패싸움을 걸어올지 모르기에 불안감에 시달린다.

패싸움은 대국이라는 거대한 전쟁 안에 존재하는 작은 전투다. 한 경기에도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만약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면 패싸움이 즐겁다. 상대 위험부담은 큰데 자기는 별로 손해 볼 게 없는 게 꽃놀이패 특징이다. 상대는 피가 마른다. 빨리 위기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려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주식 투자에서도 손해를 피하기 어렵다면 최대한 부담을 줄이는 손절매 타이밍을 잡는 게 중요하다. 꽃놀이패 상대방도 그렇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최소한의 손해로 상황을 정리할 방안을 고심하는 쪽이 마음 건강에 유리하다.

천지대패와 만패불청(萬覇不聽)은 상대적으로 낯선 단어지만, 시사용어로 종종 등장한다. SM 인수전을 놓고도 천지대패라는 평가가 나왔다. 천지대패는 승패와 직결하는 큰 패를 의미한다.

100집이 넘는 대패도 있다. 반집이나 한 집 반으로도 승부가 갈리는 바둑의 특성을 고려할 때 100집은 엄청난 규모다. 천지대패는 인생의 패자부활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좌절의 세월을 살던 사람도 천지대패의 기회만 잡는다면 판세 대역전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만패불청은 상대가 어떤 패를 쓰더라도 받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패싸움은 싱겁게 끝난다. 만패불청은 천지대패 상황에서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작은 실리가 걸린 패싸움에 등장할 때도 있다.

전체 승부에 미칠 영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승리를 일단 챙기자는 생각이 앞설 때 그런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패싸움에서 승리하면 일단 기분은 좋은데, 문제는 뒷감당이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오류. 우리 삶에서 흔한 장면 아닌가. 호되게 당한 뒤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오류를 반복하는 모습….

양보와 물러섬은 패배의 시인이 아니라 훗날을 도모하는 포석임을 깨닫기까지 지불한 인생의 수업료가 그동안 얼마인가. 하지만 수업료를 너무 아깝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설 때와 참을 때를 구별하는 능력을 갖출 수만 있다면 인생의 진정한 승부사로 거듭나지 않겠는가.

이슈1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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