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정기자
[아시아경제 서소정 기자] "한국의 큰 폴(Tall Paul)이 될 것인가."
오는 10월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7%를 넘어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오는 13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빅스텝(기준금리 0.50%포인트 인상)을 단행하며 ‘폴 볼커’ 길을 본격적으로 걸을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 전 의장이었던 폴 볼커는 40여년전 초강수 금리인상으로 인플레이션 불을 껐던 입지전적 인물이다. 201cm 키로 역대 Fed 의장 중 최장신이었던 볼커는 ‘톨 폴’이라고도 불렸다. 이 총재 역시 키가 192cm로 한은 역대 총재 중 가장 크다. 특히 한국은 지금까지 한번에 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 총재의 보폭에 어느 때보다도 이목이 쏠린다.
◆이달 금통위 빅스텝 전망 확산= 금융시장에서는 이번 금통위의 빅스텝 결정을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다. 6월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대로 외환위기 이후 약 24년 만에 6%대로 치솟은 데다 미 Fed가 지난달에 이어 이달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에 나설 경우 한미간 금리역전이 현실화해 자본유출이 본격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취임 직후 빅스텝에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했던 이 총재의 시각도 매달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이 총재는 지난 4월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을 통해 "한국은 한 번에 0.25%포인트 넘게 큰 폭으로 기준금리를 조정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일축했다. 같은 달 기자들과의 티타임에서는 ‘한국의 볼커’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의에 "(볼커가)되고 싶지 않다"고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볼커처럼 고강도 긴축으로 시장에 충격을 주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 발언의 유효기간은 한 달도 채 되지 못했다. 이 총재는 지난 5월 추경호 경제부총리와의 조찬간담회 직후 "빅스텝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면서 과거 발언을 회수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장기화와 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등으로 물가가 불안한 가운데 미국의 고강도 긴축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리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지난달 한은 창립72주년 기념사에서는 한 발 더 나가 "한국 대응이 현시점에서 선제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도 했다. 급등하는 국내 물가만큼 이 총재의 발언 수위도 점차 세지고 있는 셈이다.
폴 볼커 미 연방준비제도(Fed) 전 의장
◆볼커 물가 어떻게 잡았나 보니= 40여년만에 찾아온 고물가와 전쟁 중인 미국에서도 제롬 파월 미 Fed 의장이 볼커의 길을 따르고 있다. 1927년 독일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볼커는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 대학원, 런던정경대학(LSE)을 졸업한 뒤 체이스맨해튼은행, 미 재무부, 뉴욕연방준비은행 등을 거쳤다. 이후 지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79년 8월부터 1987년 8월까지 Fed 의장을 지내며 ‘인플레 파이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1980년 14%대까지 치솟던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인상을 단행했고 최고 22%까지 금리를 올리면서 돈줄을 죄었다.
물론 부작용도 속출했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폭등한 상황에서 초고금리 정책을 이어가자 경기는 침체했고 파산하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실업자도 급증, 실업률이 10%를 넘어서면서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볼커는 금리인상 기조를 멈추지 않았다. 지속적인 살해 위협에 그는 호신용으로 권총을 차고 다닐 정도였다.
3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1980년 14.7%에 달하던 미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1983년 7월 2.5%까지 내려왔다. 그는 임기 내내 6% 이상의 금리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부동산 시장의 버블도 가라앉았다. 볼커의 강력한 고금리 정책에 힘입어 물가안정과 산업 구조조정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미국은 1990년대 이르러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게 됐다. 파월 의장은 볼커에 대해 "위대한 관료였다"고 평가한 뒤 "역사가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록했으면 한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