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영철기자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경기도 광주시는 도자 문화를 기반한 경제 활력과 부가가치를 높일 경쟁력으로 조선시대 관영 사기 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인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을 꼽았다.
신동헌 광주시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광주가 조선 왕실 백자(白瓷)의 고장이며, 도자 메카로서 지금도 도공들이 옛 명성을 잇기 위해 혼을 담아 작품에 매진한다"라고 자부했다.
경기도사 자료에 따르면,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된 시기는 역사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 상한 연대를 대략 1430년대 또는 1460년대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분원에서 만드는 자기는 왕실 자기와 국가 행사에 필요한 그릇 등 관어용(官御用)으로 쓰여 개인이 소유하거나 매매할 수 없었다.
본지는 경기 광주에 도자기 제조장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과 이유, 그리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아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사기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 분원 설치
② 자기소(瓷器所)와 도공(陶工)
③ 자기소의 위기와 도공의 비애(悲哀)
① '사기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 분원 설치
광주 사홍원 분원 백자 자료관 [광주시]
경기도사 자료에는 조선 조정은 경기도 광주에 '사홍원(司饔院)' 분원(分院) 설치 이전에 이미 관요(官窯) 기능을 가진 자기소를 설치했다. 당시 왕실에서 쓰는 자기를 전담해 제조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사 기록에는 광주가 국가에서 운용하는 도자기 제조장을 조성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좋은 품질의 도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백토(白土)가 많이 산출됐고, 수목이 무성한 산이 가까이 있어 가마 작업에 필수인 땔나무 공급이 쉬웠다.
게다가 수도인 한양(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어 수로를 이용해 자기 원료와 제품을 비교적 손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사옹원에서는 번조관(조선시대 질그릇·사기그릇 만드는 일을 감독한 종 8품 관직) 1명을 광주 분원에 보내 사기소 운영과 관리를 지휘하도록 했다. 그 아래 원역(員役) 20명을 배치해 경영 실무를 맡겼다.
분원 백자 유물 [광주시]
한양의 사기제조장에는 원칙적으로 380명의 사기장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 수가 일정하지는 않았다. 규정 인원보다 모자랄 때도 있었지만, 많을 때는 잡역까지 포함해 530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분원 사기제조장 자체가 규모를 갖춘 별도의 마을을 이뤘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관어용 도자기 조달 방식을 기존 공납 방식 대신 국가가 직접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는데, 분원 설치가 그 결과물이다.
공납 방식의 도자기는 규격과 문양뿐 아니라 품질 면에서도 차이가 있어 고급 그릇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형태와 색채, 무늬 등 격식을 중시하는 의례(儀禮)용 그릇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조선은 국가 대소사(大小事)에서 생활에 이르기까지 의례를 중시한 사회였다. 격식과 품질을 갖춘 도자기를 지속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사옹원에서 직접 관할하는 도자기 제조장을 광주 지역에 설치했던 것이다.
광주 곤지암 도자공원 [광주시]
이 무렵은 도자기에 대한 선호도가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맑고 소박하며 단아해 보이는 백자는 화려함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 한 사대부의 취향을 충족시켰다.
예(禮)와 의(義), 도리, 명분을 앞세운 유교 통치 이념과도 어울리는 그릇이어서 백자가 일종의 이념 표출의 도구가 된 셈이다.
성종(재위 1469~1494)이 승정원에 백자 술잔을 하사하면서 남긴 말은 이런 지향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i>임금이 백자 술잔을 승정원에 하사하면서 이렇게 일렀다. "이 술잔은 맑고 흠이 없어 술을 따르면 티끌이나 찌끼가 다 보인다. 이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공정하고 지극히 정당해 한 점의 허물도 없으면 선하지 못한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게 되는 이치와 같다."</i> 『성종실록』 260권, 성종 22년(1491) 12월 7일
분원 백자 자료관 [광주시]
기록에는 당시 중국 사신 접대와 조공품으로도 많은 양의 백자가 필요했다. 한편으론 왕실과 국가 의례 외에는 금(金)장식이나 은(銀)그릇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조선 초기 정책이 백자 수요를 늘게 한 요인이다.
조선은 국초(國初)부터 금과 은을 명나라에 조공품으로 바쳐야 했기에 이에 대한 사용처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유기 그릇 원료인 구리 확보도 쉽지 않아 도자기를 많이 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현실 여건에 지배층의 이념 지향과 취향이 더해지면서 백자 수요가 급증했던 것이다. 이 또한 중앙 관청에서 운용하는 자기제조장을 설치하게 한 요인이 됐다.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