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곤기자
서울지하철 2호선 임산부석에 한 노년 남성이 앉아있다. 사진은 기사 특정 표현과 무관함.사진=김슬기 인턴기자 sabiduriakim@asiae.co.kr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임산부석 양보는 선택 아닌가요?", "배려해줄 수 있잖아요."
10일 임산부의 날을 맞은 가운데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갈등이 여전하다. 이 자리는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 마련된 임산부를 위한 자리지만 고정석이 아니다 보니 누구나 앉을 수 있고, 또 양보하지 않는 일부 승객과 다툼도 일어나고 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산부 절반 이상은 일상생활에서 타인으로부터 배려를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8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임산부의 날'을 맞아 실시한 온라인 설문 조사 결과, 임산부의 54.1%는 '배려를 받지 못했다'라고 답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달 14일부터 23일까지 임신육아종합누리집 홈페이지 등 임산부 1500명과 일반인 1500명 등 총 3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배려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 것 같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4.3%는 '배가 나오지 않아 임산부인지 티가 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임산부가 받은 배려를 살펴보면 가정 내 청소·빨래·식사 등 가사 분담이 59.9%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에서 좌석을 양보받았다는 답변도 46.5%였다.
지하철 임산부석에 붙은 안내 문구.사진=연합뉴스
임산부석 양보에 대한 시민들 의견은 엇갈린다.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한다고 밝힌 30대 직장인 김모 씨는 "임산부석 배려는 상식이라고 생각한다"라면서 "굳이 그 자리에 앉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또 자리에 앉아있어도 임산부가 나타나면 바로 자리를 양보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의견도 있다. 배려는 본인의 선택일뿐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30대 회사원 이 모 씨는 "임산부 배려석은 '배려'를 통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인데, 사회적으로 너무 배려를 강요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 자리에 앉은 사람도 몸이 좋지 않을 수 있다"면서 "너무 눈치를 주는게 아닌가,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갈등이 적지 않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2018년 임산부 배려석 관련 민원 건수는 2만7589건에 달했다. 하루 평균 75건의 민원이 들어온 셈이다.
또 지하철 이용자 10명 중 4명꼴로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본 적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 서울지하철 1~8호선 이용 시민 6179명(일반인 4977명, 임산부 12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비임산부 응답자의 39.49%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임산부가 아닌데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이유로는 '자리가 비워져 있었기 때문'이 54.64%로 가장 많았다. 이어 '강제가 아닌 배려석이라서'(26.68%), '다른 사람도 앉아서'(8.9%) 순이었다.
배려석에 앉았을 때 임산부가 있을 경우 어떻게 했느냐는 물음에는 '임산부인지 알면 양보한다'(54.66%), '임산부인지 몰라도 양보한다'(39.50%), '임산부인지 몰라서 양보 안 한다'(3.49%) 등 순이었다.
지난해 2월17일 서울지하철 4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엑스자' 모양의 낙서가 발견됐다. 사진=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갈등은 혐오로도 이어진다. 지난해 2월17일 오후 11시께 지하철 4호선 한 전동차 객실에서 임산부 배려석 위에 붙은 엠블럼에 '엑스(X)'자로 된 낙서가 발견됐다.
이 사진은 온라인 커뮤니티로 퍼지면서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다. 한 SNS 계정에는 "오늘 찍은 4호선 지하철. 모든 칸이 이렇게 돼 있었다. #임산부혐오"라는 글과 함께 사진들이 게재됐다.
네티즌들은 이 낙서는 여성 혐오이자 임산부 혐오를 나타냈다고 지적했다. 이어 "여성 혐오, 약자 혐오다", "임산부 배에서 안 태어나신 분 찾는다" 등이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전문가는 임산부를 배려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둬야 한다는 명확한 공지가 없어 임산부 배려석을 두고 갈등이 빚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며 "임산부가 아니면 모두가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보다 상황에 따라 다른 불편한 사람도 앉을 수 있게끔 하는 등 유연한 제도가 필요해 보인다"고 제언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