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지'·'거창 거열산성' 사적 됐다

조선 최고 행정기관 옛터 ‘의정부지’ “다양한 역사 층위 보여줘”
신라·백제 영토 확장 각축장 ‘거창 거열산성’ “신라 산성 변화 밝힐 열쇠”

구한말 의정부 중심 건물인 정본당 사진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의정부지(議政府址)’와 경남 거창군에 있는 ‘거창 거열산성(居昌 居列山城)’이 사적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두 문화재를 각각 사적 제558호와 제559호로 등록했다고 24일 전했다.

‘의정부지’는 조선 최고 행정기관의 옛터다. 2016년부터 진행된 네 차례 발굴조사에서 중심 전각인 정본당과 그 좌우에 있던 석획당과 협선당의 위치, 규모 등이 확인됐다. 후원의 연지와 정자, 우물 유구도 발견돼 역사·학술 가치가 높다.

1909-1910년 제작됐다고 추정되는 내부청사 신축 공사 설계도

의정부는 조선왕조 중앙 행정관청 가운데 최고위급인 정1품 관청이다.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다뤘다. 14세기 말 궁궐 앞 동편에 도평의사사(고려 후기 국가 최고 의정기구·조선 시대 의정부 전신)가 들어선 이래 조선 관청으로는 유일하게 본래 자리를 지켰다.

의정부는 태조 7년(1398) 건립됐다. 중앙에 지붕이 한 단 높은 중심 건물을 세우고 좌우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는 3당 병립 형태로 지었다. 이를 두고 정도전은 ‘도평의사사청기’에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 청사는 높고, 큰 집이 중앙에 있고, 날개 같은 집이 손을 모으듯 좌우에 있다(巍中翼拱左右)”라고 썼다.

1978년 정부종합청사에서 촬영한 의정부 터

이 같은 형태는 고종 2년(1865) 청사 건물을 다시 지을 때도 반복됐다. 문화재청 측은 “재건립된 3당 병립 형식의 의정부 중심 전각 모습이 1901년 이전에 촬영된 사진으로 확인된다”며 “네 차례 발굴조사에서도 건물 배치가 사진 자료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조사단은 1910년도 의정부지 정면에 자리했던 경기도청사 건물의 벽돌 기초가 남아 있는 사실도 확인했다. 문화재청 측은 “조선 시대 의정부와 일제강점기 경기도청사, 미군정, 정부청사 별관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며 “다양한 역사 층위들을 보여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거열산성 전경

‘거창 거열산성’은 신라와 백제의 영토 확장 각축장이다. 문헌에서 실체가 확인된 삼국 시대 거창지역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형태는 신라 시대에 축성된 1차성과 통일신라 시대에 증축된 2차성으로 나뉜다. 문화재청 측은 “신라 산성의 변화를 밝힐 수 있는 핵심 유적”이라고 설명했다.

1차성과 2차성의 둘레 길이는 각각 약 418m와 약 897m다. 2차성과 연결되지 않는 1차성 안쪽을 헐어낸 구간과 1·2차성 중복구간 등을 제외한 전체 길이는 1115m이다.

거열산성 2차성 성벽 전경

1차성은 신라가 6세기 중엽 백제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축조됐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백제 부흥 운동군 700명이 전사했다는 ‘거열성’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백제가 멸망한 뒤 3년간 부흥 운동을 전개했으나 문무왕 3년(663) 신라 장군 흠순(欽純)과 천존(天存) 부대에 대패했다. 2차성은 문무왕 13년(673) 나당전쟁을 대비하고자 축조했다는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으로 파악된다.

문화재청 측은 “서쪽 계곡에 있는 1차성과 동쪽 계곡에 마련된 2차성의 집수시설(集水施設·성내에 물을 모으는 시설)이 축조방법과 구조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며 “축성기법 변화는 물론 고대 토목공법 복원, 수리사(水利史) 연구 등에 있어 중요한 자료”라고 평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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