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box 1/정연홍

온다

사과 box 감자 box 상추 box 라면 box

하루 8시간 내리고 쌓는 것이 나의 업무

네모난 box

둥근 box는 왜 없는 거지

box 51개를 옮기고 생각에 잠긴다

유빙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box

입이 없는 box

사방이 절벽인 box

손으로 들어야 하는 box

허리에 힘을 주고

어이쌰

진열대에 올리고 또

올리고

근육이 box를 받쳐 들어 올리면

관절이 box를 받아서 놓는다

인간미가 필요 없는 box

트럭에서 하치되는 box

매일매일 내 앞에 쌓이는 box

지금 box도 나 같은 box쟁이가 놓고 갔을 것

그도 지금쯤 담배 한 대 꼬나물고 있을 것

각진 box

곡선의 유연함이 없다

거리엔 사각형 box가 달리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사각형

box에서 이불을 덮고 잠을 잔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얼굴이 자꾸

사각형을 닮아 간다

■ 달리던 박스가 멈추자 박스가 박스에서 내려 박스를 열고 박스들을 내린다. 누런 박스, 흰 박스, 거만한 박스, 새초롬한 박스, 화가 난 박스, 좀 풀이 죽은 박스……. 박스는 박스 위에 박스를 또 그 위에 박스를 또 그 위에 박스를 계속해서 차곡차곡 쌓는다. 아파트만큼 빌딩만큼 쌓는다. 딱 무너지지 않을 만큼 쌓는다. 박스가 현관마다 박스 하나씩을 놓고 초인종을 누르면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박스를 부둥켜안고 박스 속으로 냉큼 사라진다. 한마디 말도 없이 인사도 없이 박스를 정말 박스 대하듯이 대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바쁘니까, 찌그러져 폐기될 때까지 박스는 박스들을 내리고 쌓고 나눠 주고 또 뛰어야 하니까. 가끔 박스도 자신이 사람이었던 걸 기억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전생의 일만 같아 어리둥절할 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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