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 모음은 열한 개. 우리는 열 개를 사용한다. 아래아(ㆍ)를 쓰지 않는다. 언어의 소멸은 자연적인 경향이 강하다. 민중이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없애버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공표한 '보통학교언문철자법대요'에서 아래아 사용을 금했다. 법령까지 만들어 우리 글자 하나를 없애려 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래아가 하늘을 뜻하는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전해질 뿐이다.
한말의 국어학자 주시경은 '국어문전음학(1908)'에서 아래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여섯 가지 논거를 들어 '이'와 '으'의 합음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6년 뒤 발표한 '말의 소리(1914)'에선 뒷부분에 자모음을 나열하는 정도로만 거론한다. 한글 문장에도 아래아를 쓰지 않았다.
정재흠 꿈퍼나눔마을 촌장이 쓴 '어찌 상스러운 글을 쓰려 하십니까'는 지난 573년 동안 우리 민족이 한글을 어떻게 수용해왔는지 알아보는 교육 서적이다. 온갖 고난과 역경에도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한글의 발자취를 세세하게 들여다본다.
저자는 서파 유희 등 조선의 음운학자들도 아래아를 문자 언어로 계속 활용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며 주요 자료들에 나열된 모음 순서를 주목한다. 아래아는 '훈민정음(1446)'에서 가장 먼저 소개된다. 그러나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1527)'나 '언문반절표(16세기)' 등에서는 줄곧 뒤로 밀렸다. 세종대왕이 모음에서 아래아를 으뜸으로 꼽았으나 후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ㄱ', 'ㄴ', 'ㄷ' 등 자음을 대입하면 훈몽자회 등에 나열된 모음 순서의 발음이 훈민정음의 그것보다 훨씬 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최세진은 단지 실용성이 높다는 이유로 한글 사용설명서인 '훈민정음해례본'까지 무시하면서 자기만의 한글 문법 논리를 펼친 걸까. 그렇다면 그의 연구는 한글 역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분명 기존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겼을 것이다. 그러나 훈몽자회 어디에서도 그런 결의는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최세진이 '훈민정음해례본'을 의도적으로 비틀지 않았다면 당시 그는 '훈민정음해례본'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훈민정음 이야기를 모아놓고 한글 분석 성과를 내놓았다는 가설이 맞을 수 있다. '훈몽자회'에서 훈민정음이라는 말이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최세진은 '훈몽자회'의 범례 끝부분에 '언문자모(諺文字母)'라고 제목을 붙였다. 만일 '훈민정음혜래본'을 읽었다면 '훈민정음자모' 혹은 줄여서 '정음자모'라고 썼지, 언문자모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세진은 자모음 스물일곱 자를 열거하며 세속이나 시속, 다시 말해 세상 관습을 뜻하는 '속(俗)'을 썼다. 또 훈민정음이나 정음이라고 표현해야 할 곳에 '반절'이라는 당시 민중에 널리 퍼진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가 혁명적인 발상에 기인했다기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행해진 관습을 정리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훈민정음해례본'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서 벌어진 일이라고 추론한다. '훈민정음해례본'이 다시 출현한 시점은 1940년대 초반이다. 최세진, 정동유, 주시경은 이를 접해보지 못하고 한글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훈민정음해례본'이 해야 할 한글 표기법의 원전 역할을 '훈몽자회'가 하게 돼 후대 한글 연구가들에게 이것이 바로미터가 되지 않았나 한다"고 썼다.
"결국 아래아가 사라진 가장 큰 배경은 '훈민정음해례본'의 부재다. 간송 전형필의 손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500여년 동안 세상에 꼭꼭 숨어 있었다. 그래서 하늘을 뜻하는 아래아는 제조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민중의 실용성이라는 환경에 내몰리게 됐고, 그것은 차쯤 사람들의 언어습관에서 편리함이라는 흐름을 타버린 끝에 마침내 소멸되고 말았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