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날엔…]'체육관 선거'의 마침표 6·29선언, 국민 환호의 그림자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1987년 6월, 혼돈의 시간이었다. 집회와 시위는 일상이었다. 서울 시내는 뿌연 최루가스가 넘실댔다. 누군가는 구호를 외쳤다. 길을 지나던 시민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권력의 힘은 강력했다. 권력을 계속 쥐려는 의지도 강력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시위는 20대 젊은 대학생들이 주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30대 넥타이부대들이 합류했다.

대학생들은 동맹 휴업으로 결의를 다졌다. 일반 회사원과 정치인, 성직자들까지 거리로 함께 나섰다. 철옹성으로 인식됐던 전두환 정부의 절대 권력에 균열이 시작됐다. 바로 그때 어떤 정치인이 전면에 나섰다. 그 이름은 ‘노태우’.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의 대표였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의 특별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바로 그날, 6·29 선언이 발표됐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민주평화당이 국회에 내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민당 총재 시절 사진 액자. [사진제공=민주평화당]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 1988년 2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다짐했다. 야당 정치지도자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 관련 사범 석방도 약속했다. 정당 활동을 보장했고, 자유 언론을 보장했다. 지방자치와 교육자치도 보장했다.

국민이 대통령을 뽑게 해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인 셈이다. 6·29선언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의 마침표를 찍은 날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거대한 물결이 돼서 마침내 권력의 굴복을 이끈 것으로 인식됐다.

6·29 선언 이후 한국사회는 많은 게 달라졌다. 권력에 대한 거대한 저항의 물결은 점차 완화하고 12월 대선에 대한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6·29 선언을 주도한 정치인 노태우가 부각됐다.

당시로서는 6개월 후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대통령 직선제 쟁취는 분명 의미 있는 성과였다. 누군가는 6·29 선언을 신의 한 수로 평가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신의 한 수라는 의미도 있지만 전두환 정부의 권력 재창출을 가능하게 한 묘수라는 평가다.

대통령 직선제는 정치세력의 욕망을 부추겼다. 당시 집권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 정서를 고려할 때 대선은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라는 인식을 부른 원인이었다. 1987년 12월16일 제13대 대선에는 5명의 후보가 이름을 올렸다. 0.20% 득표율을 올린 한주의통일한국당 신정일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4명 모두 당선을 꿈꿀 수 있는 자기 세력이 있었다.

주인공은 민정당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였다. 재야·학생운동 세력은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 지지로 나뉘었다.

당시 재야 운동권 세력의 지지를 받았던 무소속 백기완 후보는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는 모두 양보할 의사가 없었다.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식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가 유족인사를 하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이른바 4자 필승론이라는 선거 공식이 등장했다. 특정 지역의 확실한 우위를 보이는 후보들이 난립하면 서울에서 승패가 갈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당시는 서울 유권자가 648만여명으로 경기도 유권자 335만명의 두 배에 달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와 경북, 김영삼 후보는 부산과 경남, 김대중 후보는 호남, 김종필 후보는 충남에서 절대 강세를 보였다. 김대중 후보는 서울에서 승기를 잡으면 당선이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반면 김영삼 후보는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국민이 투표장에서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며 단일화 효과를 유도하는 방안이 마지막 남은 해법이었다.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 모두 그 주인공은 자신이 될 것으로 굳게 믿었다. 예상대로 두 후보는 자신의 정치적인 텃밭에서 경쟁 후보를 압도했다. 김영삼 후보는 부산에서 55.98%의 득표율을 올렸다. 김대중 후보는 광주에서 94.41%라는 기록적인 득표율을 올렸다. 김종필 후보는 전국적으로는 8% 득표에 그쳤지만 충남에서는 45.03%로 단연 1위였다.

지역감정이 극심했던 1987년 대선, 그날의 승자는 예상대로(?) 수도권에서 갈렸다. 이른바 4자 필승론은 역으로 4자 필패론의 불씨가 됐다. 인천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1위였다. 노태우 후보는 39.35%, 김영삼 후보는 29.99%, 김대중 후보는 21.30%를 얻었다.

경기도 역시 노태우 후보가 경쟁 후보를 압도했다. 노태우 후보 41.44%, 김영삼 후보 27.54%, 김대중 후보 22.30%로 조사됐다. 흥미로운 점은 인천과 경기에서 노태우 후보가 전국 평균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전두환(사진 오른쪽)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당시 전국 최다 유권자가 몰려 있던 서울은 어떤 결과로 나타났을까. 김대중 후보 또는 김영삼 후보가 서울에서 몰표를 받았다면 1987년 대선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결과는 김대중 후보 32.62%, 노태우 후보 29.95%, 김영삼 후보 29.14%로 나타났다.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꿈꿨던 유권자들의 후보 단일화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 노태우 후보는 서울에서도 2위의 득표율을 올렸다. 최종 득표율은 노태우 후보 36.64%, 김영삼 후보 28.03%, 김대중 후보 27.04%로 조사됐다.

1988년 2월부터 대한민국을 이끌 차기 대통령에 노태우 후보가 선출됐다. 대선 3일 후인 1987년 12월19일 주요 언론 1면에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악수하는 사진이 실렸다.

6·29 선언이 국민 승리의 결과물이라고 환호했던 시민들은 그 모습을 보며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당시 집권 여당은 대통령 직선제 이후 출범한 새로운 정부에서도 집권 세력의 지위를 유지했다. 1987년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서 땀과 눈물, 피를 흘렸지만 권력은 바뀌지 않았다.

<center><div class="slide_frame"><input type="hidden" id="slideIframeId" value="2019040710170371982A">
</center>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정치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