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유령의 나날/이기성

유령은 지루하다. 찻잔 밑에 비눗갑 아래 소파 밑에서 유령은 기다린다. 나를 찾아보아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 유령은 눈사람처럼 뚱뚱하다. 열쇠 구멍,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유령은 아이처럼 폴짝 뛰고, 이빨을 뽑고, 입안의 구멍에 혀를 대어 본다. 비릿한 유령의 맛이다. 유령은 검은 프라이팬 위의 콩처럼 뜨거운 땀을 흘린다. 유령은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놀라서 하얗게 얼어붙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유령의 하품이 검게 퍼져 나간다. 검은 유령은 검음이 지루하다.■<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영화가 있다. 이야기의 대강은 빛을 보지 못하는 희귀병을 앓는 어린 남매와 이들을 어둠 속에서 지키며 살아가던 엄마가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을 겪다가 실은 자신들이 오래전에 죽은 유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공포물이긴 하지만 무척 슬픈 영화다. 그건 그렇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나는 혹시 내가 유령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니 그보다는 하루하루가 하도 지루해서 유령이라도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살짝 바랐었다. 그래서 괜히 거실 바닥을 멍하니 보다가 천정 구석이나 현관문이나 거울을 향해 고개를 갑자기 홱 돌리기도 했다. 어쩌면 거기에 좀 굼뜬 유령이 화들짝 놀라 기절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말이다. 여하튼 그때 난 누구였을까? 사람이었을까 유령이었을까? 아니면 설마 나비였을라나?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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