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초대석] '삼성의 1.5조 획기적 지원…성과·인기보다 창의성 승부'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출범 3년 새로운 과제와 갈 길

"10년 후 1,2개라도 성공할만한 연구 키우는게 목표" "지원했던 과제들의 출구(Exit) 평가 기준마련 고민"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이 지난 3일 삼성 서초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백소아 기자)

[대담=아시아경제 이정일 산업부장, 정리=김은별 기자] "삼성이라는 민간기업이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조건없이 지원하는 일은 굉장히 의미있습니다. 3년간 재단 운영을 맡으면서 우리나라의 연구 풍토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지난 2013년 8월, '한국 기초과학 육성'이라는 큰 목표를 내걸고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이 출범했다. 삼성그룹은 2022년까지 10년간 총 1조5000억원의 국가과학기술연구를 지원하는 연구비를 내놓기로 했다. 민간 기업 차원에서 이 정도 규모의 기초과학 지원 사업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이 재단이 설립된 지도 어느덧 3년이 흘렀다. 삼성은 미래기술육성재단을 통해 지난 3년간 총 243건의 과제와 2500여명의 연구자를 지원했다. 재단 설립 초기부터 함께한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은 "이제는 지금까지 지원했던 과제들의 출구(Exit) 평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밝혔다. 지원한 과제들 중 어떤 과제는 추가 지원을 할 지, 어떤 과제는 지원보다는 사업화를 하는 데 힘을 실어줘야 할 지 등을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 골라내줘야 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해외의 유사한 기관들의 사례도 연구하고 있다. 취임한 지 3년이 지나면서 비로소 재단의 행보에 더 확신이 생겼다는 국 이사장. 그로부터 지난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의 3년과 앞으로의 향방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 3년 재단을 운영해 본 소회는.▲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는 느낌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한국의 연구풍토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학교수라는 본업 외에 추가 시간을 여기에 쏟고 있는데 제 시간이 가치있게 쓰이는 느낌이다. =설립 당시 삼성측의 주문은 ▲삼성그룹은 재단 설립 단계부터 전문가들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설립 전에도 전문가들에게 '재단의 철학 정립을 알아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양희 장관을 비롯해 교수, 삼성 종기원 관계자 등이 모두 모여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구 지원제도를 만들자'고 4~5개월간 머리를 맞대 이와 같은 재단을 꾸리게 됐다. =1조5000억원이나 투입되는데 성과에 대한 부담이 없나▲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과학연구에 투자를 시작한 것은 1990년으로, 26~27년간 투자가 진행됐다. 최근 국가 연구비투자만 18조원, 민간투자까지 하면 60조~70조원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규모는 커졌지만 '우리나라의 성과'라고 내세울 만한 것은 많지 않다. TVㆍ스마트폰과 같은 제품은 물론이고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한국의 성과'라고 내세울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은 정부지원금보다는 훨씬 적지만, 연구지원 방법론적으로 실수한 것을 살펴보고 모델을 만들었다. '성과에 대한 정량적인 압박'이 없는 지원이다. 정부 차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매년 사용한 예산에 대한 답을 내야 한다. 특허 개수, 기술료, 학술지 등재 수 등의 평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우리는 외형적인 성과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양적인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향후 10년 후에 1,2개라도 성공할만한 연구를 키울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성공이라고 보기 때문에 개념이 다르다. =지원과제 선정 기준은?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창의성'이다. 남들이 하는 것을 발전시킨 연구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부분에 대한 연구를 되도록이면 뽑고자 한다. 수학의 난제를 풀겠다는 연구자, 초끈이론 등 순전히 가능성만 보고 지원하는 과제들이 많다. 재단에서 지원하는 과제에 선정되기 위해 응모한 연구자들도 선정 절차를 거치면서 '자기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연구자 이름이 가려진 2페이지 짜리 아이디어 심사 과정, 세밀한 연구계획을 담은 20페이지 서류 심사과정, 면접과정, 해외심사 등을 거치는데 1단계인 2페이지짜리 아이디어 과정부터 연구자들이 딱 막혀버린다. 지금까지 "내 과제가 창의적인 아이디어인가"라는 고민을 하지 않고 연구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들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든 것 자체가 자랑스럽다. 한 번 떨어진 연구자가 '이런 과정을 만들어 줘 고맙다'라고 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을 정도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면 추가 지원도 가능한가 ▲그렇다. 이 부분과 관련해 고민하기 위해 2달 전 HHMI(하워드휴스의학연구소)를 방문해 힌트를 얻었다. 연구가 끝나는 시점에 점검해 추가 지원을 할 지, 성과를 얼마나 냈는지 평가하는 것을 딜리션테스트(Deletion Test)라고 한다. HHMI의 경우 연구자들을 지원한 후 5년 후에 '이 사람과 이 업적을 지웠을 때 그 분야는 어떤 상태인지' 지워보며 평가하는 것. 확실한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되는 경우 추가 5년을 지원한다고 한다. HHMI에서만 노벨상 20명을 배출한 비결이다.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진행해보려고 한다. 올해부터는 연차회의때 연구자들에게 공지를 통해 과제 종료 기준을 알리고, 연구를 연장하거나 사업화, 펀딩 등으로 이어나갈 것이다. =벨연구소 출신이고 최근에는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를 최근 찾았다고 들었다. 느낀 점이 있다면 ▲벨 연구소에서 있던 시절, 그들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학계에 나가서 유명해지라"라는 것이다. 매년 연봉의 4배 정도는 연구비로 마음대로 쓸 수 있었고, 협상하면 연구비를 늘릴 수도 있었다. 미국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세상을 끌고 나갈 때는 이런 지원이 바탕이 됐다. 미국 내에는 민간 연구지원 단체들끼리 협의체를 만든 경우도 있다. 저커버그도 부인과 함께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는데, 내년 봄엔 그곳을 방문해 노하우를 배울 생각이다. 해외 단체들을 보면서 내 맘속에 있던 일말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우리도 꾸준히 지원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 이런 자신감은 정말 중요하다.=삼성이 향후 10년간 투자를 약속했지만 대내외 여건이 어려운 상황이다▲만사는 균형이 모든 것을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되려 더 미래에 투자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투자의 감이다. 결코 미래에 대한 투자를 완전히 버려서는 회사의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투자의 묘를 발휘하지 않으면 언제든 노키아처럼 몰락할 수 있다.=재단 이사장으로서 학자로서 후배 연구자들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연구자들도 인기를 좇는 현상이 아쉽다. 연구하는 선생님들이 삼성ㆍLGㆍ현대차와 같은 기업을 좇아다닌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암울하다. 연구자들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예측하고 던져줘야 하는데, 그런 태도의 변화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것 같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외형적인 성공에 매달리다 보니까 연구 자체도 피상적으로 변해간다. 국내 대학과 연구소를 다 합치면 연구자가 60만명인데, 그 중에 20만명만이라도 자기만의 분야 길목을 잘 지키면 그 힘은 정말 무서울 것이다. 60만명이 다같이 공 하나를 쫓아가선 안 된다. 노벨상은 항상 자기 분야를 굳혀가고 깊이있게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그 시대에 인기있는 학문을 쫓아가는 사람에게서 나오지는 않는다. 일본 역시 과거엔 노벨상 로비를 하기도 했는데, 결국 이런 방식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기초과학 분야에서 인기를 좇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쉽게말하면 아카데미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돈만 많이 번 상업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못 받는 이치와 같다. 노벨상의 취지는 공식 홈페이지에도 써 있다. '인류를 위해 새 분야를 연 사람'이다. =최근 여러 재단의 설립과정이나 비리가 나온다. 부담은 없나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재단은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은 목돈을 내놓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가서 돈을 받아온다. 올해는 이런 연구에 지원하겠다고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보고하고 자금지원 승인을 받는다. 권 부회장도 "이왕 투자하게 된 만큼, 정말 연구에 적합한 모형을 보여주자"며 힘을 실어준다. 소재나 ICT 연구과제를 보면서 나중엔 어떤 제품이 나올지 상상하며 서로 얘기하기도 한다.=미래기술육성재단은 미래기술 육성이라는 이름대로 갈 것인지.▲그렇다. 2013년에 그렇게 결정했고 지원은 계속될 것. 우선 10년이 약속됐고, 마지막 연도에 지원받는 연구자가 5년동안 받는것까지 감안하면 앞으로 15년간 삼성의 기초과학 기술 지원은 지속된다. 연구자들을 잘 관리하고 출구전략도 잘 짜줘 1~2명의 성공이라도 배출, 한국과학기술계에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다.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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