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온 나라에 불이 났다. 그것도 이만 저만 큰 불이 아니다. '최순실 게이트'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나섰다. 보통 이정도면 나랏님도 대책을 내놓기 마련인데, 시대별로 차이가 크다. '성군(聖君)' 세종대왕은 큰 화재를 당한 후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소방기구인 금화도감을 만들었다. 화재피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해 빨리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죽은 소나무'를 베어 주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사상 최악의 국정 농단 사태라는 큰 불을 진압해야 할 박근혜 대통령의 수습 대책은 오히려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 말 나온 김에,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화재와 소방기구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대연각화재
▲역대 대형 화재 사고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정부 수립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크고 작은 화재사고가 빈발했다. 화재는 한 순간의 부주의와 미흡한 소방시설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참화로 이어지며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재산 피해를 입혔다. 해방 후 첫 대형 화재 사건으로는 1953년 1월 발생한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가 꼽힌다. 6.25전쟁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있던 부산에서는 국제시장 전체를 불태우는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4260채가 전소하고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하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또 같은 해 11월 부산 중구의 피난민 판자촌 일대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부산은 전쟁과 화재라는 이중, 삼중의 고통으로 신음했다. 1971년 성탄절에 발생한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도 손꼽히는 대형 사건이다. 당시 22층의 초고층 빌딩이었던 서울 대연각호텔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해 화재가 발생했다. 대통령 전용헬기까지 동원해 구조작업을 벌였지만 2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특히 이 건물에는 스프링클러, 탈출용 밧줄 등 소방시설이 없어 피해를 더욱 키웠다. 대연각화재는 화재보험 제도의 시발점이 됐다. 정부는 이후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의무적으로 화재보험게 가입하도록 했다. ▲소방기구의 역사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출범한 소방행정 조직은 내무부 치안국 소방과였다. 이후 내무부 소방국(1975년), 소방방재청(2004년) 등으로 조직규모가 점차 확대됐다. 2014년에는 소방방재청과 해양경찰청 등을 통합한 국민안전처가 출범하면서 중앙소방본부로 재편됐다. 중앙소방본부는 그러나 중앙119구조대와 권역별 구조대, 교육ㆍ훈련, 제도 등 지원 기능만 담당하고 있다. 실제는 전국 16개 시ㆍ도에 설치된 소방방재본부가 지자체 소속으로 화재 진압ㆍ구급환자 이송ㆍ재난 대응 등의 실무를 수행하고 있다.
위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아시아경제DB
▲소방의날이 11월9일인 이유는?정부는 1948년부터 매년 11월을 불조심 강조기간으로 정해 화재 예방 활동에 힘쓰고 있다. 1991년 이전에는 매년 11월1일 유공자 표창과 캠페인 등의 행사를 해오다 지난 1991년 소방법을 개정해 11월9일을 법정기념일인 '소방의날'로 제정했다. 소방의날을 11월9일로 정한 것은 119 화재신고 전화 서비스에서 유래됐다. 119는 일제시절인 1935년 10월1일부터 시작된 각종 신고전화 10개 서비스 중 하나였다. 전화번호 안내 114도 이때 함께 정해진 번호다. 정부는 1991년을 소방의날을 제정하면서 대중에 널리 알려진 화재신고 전화번호를 활용해 11월9일을 소방의날로 정했다. ▲세종, 금화도감 설치화재는 인류의 불 사용과 함께 시작된 재난이다. 우리나라 소방기구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세종 8년 설치된 금화도감(禁火都監)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태조 원년 1392년 설치된 '무비사(武備司)'가 최초의 소방기구인 것으로 확인됐다. 태조는 병조 내에 무비사를 두어 중요 문서 전달, 순찰 등의 업무와 함께 화재 예방 역할도 하도록 했다. 현재 우리가 흔히 쓰는 '소방'(消防)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고종 32년인 1895년부터다. 신설된 경무청 총무국이 수재, 화재, 소방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소방 대신 금화(禁火) 또는 멸화(滅火)로 표기했다.세종이 금화도감을 설치한 것은 1426년 발생한 한성부 대화재 수습대책의 일환이었다. 한성부 대화재는 조선시대 최악의 화재였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실록에는 "점심때쯤 서북풍이 강하게 부는 가운데 한성부의 남쪽에 사는 인순부의 종 장룡의 집에서 불이나 경시서(京市署, 시전 관리기관) 북쪽의 행랑 106간, 중부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연소됐다"며 "남자9명, 여자 23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다음 날에도 잔불에 의한 화재가 발생해 인가 200여호가 소실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틀간 한성부 전체 가구의 17%가 화재로 소실된 대화재였다. ▲세종의 화재에 대처하는 자세당시 세종은 강무(講武, 임금이 참관하는 군사훈련 겸 수렵대회)를 떠나 강원도 횡성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궁궐에 남아 있던 중전이 최고책임자로 화재 진압을 지휘했는데, "돈과 식량이 들어 있는 창고는 포기하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은 온 힘을 다하여 지켜라"고 명할 정도로 상황이 위급했다. 나중에 이를 보고받은 세종은 몹시 짜증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실록에는 세종이 "이번 강무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경들이 굳이 가자했고, 어제도 바람이 심하고 몸이 불편하여 돌아가자고 했으나 경들이 반대해… 이런 재변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이 후회한다. 내일 궁으로 돌아갈 터이니 준비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짜증과 달리 세종의 화재 수습 대책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세종은 화재발생 4일 만에 환궁해 피해 상황을 파악한 후 "화재를 당한 집 수와 인구를 조사하고 어린이와 장년을 나누어 구제해 굶주리거나 곤란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고,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죽은 소나무를 베어 주어라"고 지시했다. 주목할 것은 '죽은 소나무'를 베어주라고 했다는 대목이다. 이는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튼튼한 집을 짓도록 한 배려였다. 소나무는 좋은 목재지만 생나무는 말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노력이 들더라도 이미 잘 건조된 죽은 소나무를 구해 보급하면 집 짓는 데 훨씬 시간이 절약된다. 백성을 지극히 아꼈던 세종의 따뜻한 애민정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후 세종은 우리나라 사상 최초인 독립 소방 기구 '금화도감'을 만들었다. 소방관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해 야간 통행금지 시간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했다. 수해 업무, 성곽 유지 관리, 소방도로 개설 등의 업무도 추가로 금화도감이 맡게 된다.▲ 불조심, 예나 지금이나요즘처럼 한식날 성묘객의 실수로 인한 산불도 잇달았던 모양이다. 1431년 3월27일 세종실록에는 "한식날부터 3일 간은 아침 일찍 밥을 짓고 그 외의 시간에는 불을 사용하지 말도록 전교하였으나, 이는 선량한 백성들을 범법자로 만들 수 있다"며 "실화(失火)는 따로 때가 있는 것이 아니고, 화기사용 금지를 법으로 정한다고 백성들이 이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 법은 전과자를 양산할 뿐이니, 법으로 정하기보다 금화도감이 순찰을 강화하여 화기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기록돼 있다. 또 불법주차 등에 의해 소방도로가 막혀 화재 진압을 방해 받는 일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태종실록' 13권 1407년 4월20일 첫번째 기사를 보면, 한성부는 "큰 길 이외의 여리(閭里, 여염집)의 각 길도 본래는 평평하고 곧아서 차량(車兩)의 출입이 편리하였는데, 무식한 사람들이 자기 주거를 넓히려고 도로까지 침범하여 울타리를 치거나 집을 지었고 심지어는 길을 막아 화재가 두려우니 도로를 다시 넓혀야 한다"고 보고했다. 20여년이 지난 세종실록 40권 1428년 4월24일자에는 찬성(贊成, 종1품) 권진이 "금화도감이 도로개통을 위해 인가를 많이 헐고 있다"고 보고하자 임금이 "헐지 못하게 하라. 태종 때도 도로를 내는 것이 좋겠다하여 개설하려 했으나 관리들이 이숙번을 두려워하여 그의 집 앞을 피해 다른 방향으로 도로를 낸 적이 있다"고 반대한 기록도 있다. 종합해보면, 조선 조정은 당시 한성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소방도로를 개설하긴 했지만 당시 실세 중에 한사람이던 이숙번의 집을 피해가다 보니 제 기능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4년 남짓 국정 난맥상이 드러났던 곳곳마다 발견되는 최순실의 흔적. 조선시대에도 '최순실'은 있었던 모양이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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