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스토리 - 적요한 인생에 피사체가 더욱 또렷이 보인다, 나이를 넘는 사랑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영화 '은교'(2012)는 4년 뒤 배우 김고은에게 찾아올 운명에 대한 예고편이었을까. 17세 소녀와 70대 노인의 은밀한 성애(性愛)를 다룬 영화 속에서 김고은은 티없이 맑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순수의 화신이었다. 사랑을 가로막는 '나이의 벽'은 없다는 걸 '은교'는 아름답고 실감나게 보여줬다. 그 정도의 격차는 아니지만, 김고은에게 다가온 사랑 또한 '은교'스러웠다. 24일 신하균(42)과 김고은(25)의 소속사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는 두 사람의 열애 사실을 시인했다. 두달째 열애 중이라고 했다.
영화 '은교' 중에서
김고은과 신하균은 함께 스킨스쿠버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요한 바닷 속에서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함께 가졌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문득 선후배 배우가 아닌 연인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이를 정지시킨 듯 동안을 유지해온 신하균과 일찍부터 신비한 성숙미를 풍겨운 김고은의 만남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뉴스가 전해질 무렵, 영화 '은교'를 리플레이 해본다.
영화 '은교'중에서
박범신 소설을 영화화한 이 스토리는,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오래전 신라 향가 '헌화가'에서 우린 그 남자와 그 여자를 이미 만났었다. 여자는 8세기 무렵 신라의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수로부인이다. 성덕왕대의 순정공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동행하여 동해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다 바위 벼랑에 있는 철쭉꽃을 보고 소리쳤다."아름다워라. 저 꽃.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줄 사람은 없는지요?"
영화 '은교'중에서
벼랑 한 가운데 핀 꽃을 누가 꺾으러 내려가겠는가. 그 꽃 한 송이 따위에 누가 목숨을 걸겠는가. 아름다운 여인의 간청이라 하더라도, 죽음과 바꿀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적어도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한 사내들도 슬그머니 그 말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때 짜~안 하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암소를 끌고 가마 앞을 지나가다가 멈춰섰다. 백발에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남자는 수로부인 앞에 나아가 이렇게 노래를 부른다. 紫布岩乎邊希 자줏빛 바위 가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吾兮不喩慙兮伊賜等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花兮折叱可獻乎理音如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영화 '은교'중에서
돌덩이가 천길 아래로 떨어지는 벼랑을 아슬아슬하게 내려가 꽃을 꺾어온 늙은 남자는, 여인에게 공손히 꽃을 바치고는 말없이 사라졌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이란 말 속에 들어있는, 자의식이 묘하게 가슴을 흔든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저 스토리를 박범신은, 거울을 벼랑 중턱으로 떨어뜨린 17세 은교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가는 70대의 이적요시인의 모티프로 부활시켰다. 어린 그녀에게 바치는 노시인의 헌화가이다. 늙어가는 존재의 성적 퇴화에 대한 비감이 섞여든 것은, 리얼리티를 위한 장치 정도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 삼국유사 스토리가 묻고 있듯이 '사랑이란 무엇이냐'이다.
영화 '은교'중에서
강릉태수 순정공은 물론이고 그 주위에서 그녀를 호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꽃을 꺾으러 가려 하지 않았다. 자기 목숨보다 저 꽃이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한 노인이 목숨을 걸고 꽃을 바쳤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에게 꽃을 바친다는 건, 순정한 사랑의 표상이다. 이것을 뭐라 말할 것인가. 사랑은 젊음에게만 고유한 것인가. 순정은 나이들수록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얘기가 아닌가.
영화 '은교' 중에서
영화 <은교>의 이야기 장치들은 헌화가 노인이 목숨을 걸고싶을 만큼 사랑을 느끼는 그 대상에 대한 절절한 기록이다. 그 헌화가 노인은 다름 아닌, 늙어가는 모든 혹은 많은 남자들의 내면이기도 하다. 젊음이 상을 받은 게 아니듯 늙음 또한 벌을 받은 게 아니라는 것.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잠깐 갈아입는 무상한 육신의 옷. 그러나 사랑은 그것 저 아래에 숨어앉아 세월이 갈 수록 더욱 깊고 애절하고 뜻밖의 희열로 닥쳐드는 것이 아니던가. 누가 말했듯이 적요한 인생에 더욱 피사체가 또렷하게 보인다. 젊을 때는 놓치고 지나간 것들이, 그 아름다운 빛과 냄새와 소리와 그림자와 뉘앙스들이, 그제서야 보인다는 주장을, 영화는 헌화가를 빌어 드러내고 있다.
곧 개봉될 영화 '올레'에 출연한 신하균.
숱한 감관의 기억들이 누적된 신체를 우린 '늙음'이라 부르지만, 우린 그걸 너무 조롱해온 건 아닐까. 사랑에서 '나이 차이'란, 태초의 순수영혼과 시간의 사이클을 통과해 거듭 순수해진 영혼이 서로를 응시할 때, 아침 이슬방울처럼 증발하는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의 특별한 시작을 축하하며, 영화를 새롭게 곱씹는 날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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