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 굳히는 美은행] 월가, 유럽금융 삼킨다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세계 경제는 여전히 2008년 금융위기의 상흔을 털어내지 못한 채 고착화된 저성장에 신음하고 있다. 위기를 잉태한 주범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를 기초자산으로 파생상품을 만들어 장난(?)을 쳤던 미국 월가 은행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되레 세계 금융시장의 헤게모니를 더욱 강력히 움켜쥐었다. 가장 큰 경쟁자였던 유럽 은행들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과 유럽 은행 모두의 위기였지만 이어진 2010년 유럽 부채위기는 온전히 유럽 은행들의 몫이었다. 유럽 은행들의 위기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때문에 더욱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과적으로 브렉시트는 미국 은행들이 금융시장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으로 예상된다. ◆美은행 매출·보수 유럽 두배= 금융정보업체 트리큐먼(Tricumen)에 따르면 세계 금융위기 직전이었던 2007년, 미국 5대 투자은행의 채권·외환·원자재(FICC) 사업 매출 총계는 380억달러였다. 유럽 8대 투자은행의 FICC 매출이 480억달러로 더 컸다. 하지만 지난해 미국 은행들의 FICC 매출은 430억달러로 증가한 반면 유럽 은행들의 FICC 매출은 260억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FT)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FT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투자은행 부문 상위 5개 은행인 JP모건 체이스·시티그룹·모건스탠리·골드만삭스·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매출 총계는 1385억달러였다. 유럽 투자은행 상위 5개 은행인 도이체방크·바클레이스·BNP파리바·크레디스위스·UBS의 매출 총계 601억달러의 두 배가 넘었다. 지난해 세전 기준 순이익 격차는 미국 은행 355억달러,유럽 은행 42억달러로 압도적이었다. FT의 또 다른 분석은 은행들의 실적 격차가 은행원들의 보수 격차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FT는 기업보수 분석업체인 에퀄리아와 함께 세계에서 최고경영자(CEO) 보수가 가장 많은 20개 은행을 조사했다. 명단에 포함된 6개 미국 은행의 CEO 평균 보수는 2070만달러였다. 반면 11개 유럽 은행 CEO의 평균 보수는 1040만달러로 절반에 불과했다. ◆연이은 위기로 쇠락한 유럽 은행= 미국과 유럽 은행간 힘의 차이가 벌어진 계기는 2010년 그리스에서 시작된 유럽 부채위기였다. 2008년 금융위기의 진앙지였던 미국 월가는 당시 위기를 통해 확실한 구조조정을 했다.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러더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베어스턴스는 JP모건 체이스에, 메릴린치는 BOA에 넘어갔다. 경쟁자가 줄어든 자국 시장에서 살아남은 미국 은행들은 좀더 튼튼한 입지를 다졌고 자연스럽게 유럽 공략에 전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하지만 유럽 은행들은 연이은 부채위기로 구조조정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 했다. 유럽 시장 경쟁이 훨씬 더 치열하는 점도 유럽 은행들에는 불리한 점이었다. 미국은 5~6개의 대형 글로벌 은행들이 투자은행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유럽 시장에서는 국내 영업에 주력하는 작은 은행들도 투자은행 시장에 참여하면서 시장 경쟁자들이 미국에 비해 훨씬 많다. 이 때문에 바클레이스의 존 맥파레인 회장은 지난해 10월 FT와 인터뷰에서 미국 은행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럽 투자은행들의 통합을 추구해 '투자은행 챔피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은행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정치인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브렉시트로 격차 더 벌어질듯= 하지만 맥파레인 회장의 기대와 달리 유럽은 통합이 아닌 분열의 길로 들어섰다. 영국이 지난달 23일 EU 탈퇴를 결정한 것이다. 유럽 금융중심지 런던을 품은 영국의 금융 산업은 2014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2%를 담당했다. 영국에서는 금융업과 관련 서비스에 종사자가 220만명 있으며 이 중 70만명 이상이 런던에서 일한다. 브렉시트로 이 거대한 인적·물적 자원의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미국 은행들에 이는 위기이자 기회다. 당장의 비용 증가는 미국 은행들에도 부담이다. 미국 5대 은행은 런던에서 4만명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컨설팅업체 크로스브리지는 브렉시트로 인해 금융 인력 1인당 약 5만파운드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했다. 런던의 금융 인력을 유럽 본토로 재배치하고 새로 인재를 뽑고 사무실 등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비용을 계산한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 은행들에 기회가 올 수 있다. 은행 업종 애널리스트로 유명한 CLSA의 마이크 마요는 "미국 대형 은행들은 약해진 유럽 은행들보다 더 큰 시장 점유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며 "추가적인 비용과 미국 은행들 나름대로의 불리한 점이 있지만 이에 비례해 미국 은행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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