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국회가 매년 예산안을 처리하는 날은 정치권이 '민낯'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여야간의 창과 방패, 지혜와 전략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이 순간 양측은 모두 사력을 다해 격돌하기 때문이다. 매해 예산안 처리는 예사롭게 넘어가지 않았지만 올해는 유독 더 심했다. 1일 낮부터 3일 새벽까지 우리 정치권은 스스로의 한계와 모순을 온 힘을 다해 '폭로'했다. 여당은 '청와대 앞에 당은 을(乙)'이라는 취약한 당청관계를 보여줬다. 야당은 취약한 의사결정 구조와 전략부재를 국민과 언론에 다시금 확인시켜줬다. 아울러 지도부의 법안 바꿔먹기도 위험신호를 한참 넘어섰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줬다.◆청와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여당 = 당초 여야는 2일에 본회의를 열기로 일정 등에 합의가 이뤄졌다. 예산안 이전에 한중FTA 처리 등을 둘러싸고 여야는 본회의 처리 법안과 예산안 등에 대해 일정한 조율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누리과정 등 예산현안을 두고 여야의 힘겨루기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은 있었지만 극한의 대결구도는 예상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상황은 1일 오후 3시 정부와 여당이 긴급 당정을 개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이 자리에서 "새누리당은 예산과 관련해 시급한 민생경제 관련 법안, 노동개혁 5개법안을 반드시 연계해서 처리하겠단 뜻을 밝힌다"고 천명했다. 앞서도 새누리당 법률과 예산안 처리를 연계하겠다는 방침을 내놓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같은 발언은 야당을 압박하기 위한 '엄포'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마는 현실이 됐다. 국정운영의 책임을 갖고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해야 하는 여당이 야당을 상대로 법안을 처리해주지 않으면 국회의원 전원이 각각의 상임위원회에서 심사하고 다시 50명의 예산결산특별위원들이 검토한 예산안을 처리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제대로 된 논의도 이뤄지지 않은 법을 가지고 예산안 국회 심의안이 아닌 정부 원안을 처리할 수 있다고 밝히는 것은 국정 운영을 책임지는 '여당'의 언어라고는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여당은 자신들이 제시한 법을 야당이 처리해주지 않으면 73일간 국회의원과 보좌진, 입법부 관계자, 정부가 머리를 싸맸던 예산안을 처리 안 해도 좋다고 나섰다. 더욱이 김 대표는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여야간 쟁점이었던 노동개혁법 처리를 꺼내들었다. 그동안 여야 협상과정에서는 여당은 경제활성화법을 야당은 경제활성화법을 요구했었다. 이 때문에 노동개혁법 처리 요구는 전혀 뜻밖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노동개혁법을 둘러싼 여야간의 이견차이는 첨예한 수준이다. 여야간 논의과정이 있어왔던 경제활성화법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여당이 이같이 나오자 야당의 반응은 하나로 귀결됐다. 여당이 약속을 깼다는 것이다. 이종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이날 긴급 의원총회를 연 뒤 "어제 한중 FTA 비준을 앞두고 양당 대표,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수석부대표 등 4+4회담에서 김 대표로부터 법안과 예산을 연계하지 않기로 하는 약속을 원했고, 김 대표가 동의했었다"며 "김 대표가 정치적 신의를 (어긴 것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법안은 논의하지 않기로 했는데 느닷없이 이를 요구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이 원내대표는 사과를 요구했다. 그는 이날 심야에 여야간 긴급회동에서도 김 대표의 사과를 전제로 참여한다고 말했다.(하지만 김 대표는 사과 등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왜 여당은 갑자기 강공으로 전환했을까? 이를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바로 청와대 정무수석의 국회 출현이다. 청와대와 국회 관계를 조율하는 현기환 정무수석은 이날 여러차례 국회에 출몰했다. 그는 실제 수시로 협상 상황을 보고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조윤선, 박준우 전 정무수석과 전혀 다른 공세적인 모습이었다. 야당관계자들은 여당에게서 눈빛에서 공포를 읽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박 대통령이 그동안 진실한 사람, 립서비스 등 국회를 상대로 고강도로 압박을 진행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데 이제는 아예 정무수석이 '감독관'처럼 나타난 것이다. 1일에서 2일 새벽으로 이어지는 협상 상황도 흥미롭다. 여당의 강공으로 시작된 이날 협상에서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몸으로 막으면서 이종걸 원내대표가 퇴장하는 것을 막았다. 강공에 나선 것도 통사정에 나선 것도 여당이었다. 협상이 끝나고 몇시간 뒤 이 원내대표는 오전에 열린 당내 회의에서 "청와대 새누리당의 노골적으로 협상에 간섭하는 모습들이 보였다"며 "새누리당은 당정협의가 아니라 청와대의 최종재가를 받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청와대에 사정없이 휘둘리는 새누리당의 부끄러운 민낯을 볼 수 있었던 하루였다"고 비판했다.국회가 파국상황에 이르렀음에도 현 수석은 여야가 가까스로 타결 지은 합의안에 대해 불만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동개혁법과 관련해 여야간 논의에서 절충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여당에 대한 박 대통령의 평가는 어땠을까?유럽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박 대통령은 공항에 마중 나온 여당 지도부를 향해 "수고하셨다"면서 "앞으로 더 노력해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원 원내대표는 "노동개혁(입법)은 첫 단추를 잘 꿰었으니 더 노력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첫 단추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야간의 불신의 벽은 올해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더욱 높이 싸였다. ◆원칙은 쉽게 포기하고 편법을 선택 = 우리나라는 상임위원회 중심의 국회 운영을 채택했다. 법안이나 예산안 등에 대해 소수의 상임위원이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방식이다. 국회의원이 비록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상임위원회 활동을 하다보면 자체 학습과 정부 보고, 법안 심사 작업 등을 거치면서 전문가에 가까운 전문성을 취득하게 된다. 전문성과 논의의 신속성 그리고 민주성을 절충한 결과물이 오늘날 상임위원회 중심주의다. 하지만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이같은 상임위 중심주의는 무력화 됐다. 여야 원내지도부는 2일 새벽까지 협상을 통해 예산안 수정안과 국제의료법, 대리점법, 모자보건법, 전공의법, 그리고 관광진흥법 5개 법안을 같이 본회의에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 법안은 관련 상임위원회에서 법안 심사조차 종료되지 않은 법이다. 절차가 끝나지 않은 법들이지만 여야 원내지도부 결정으로 절차를 약식으로 건너가자는 것이다.이같은 여야 협상에 대해 의외의 복병이 나왔다. 법제사법위원장인 이상민 새정치연합 의원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 의원은 2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어제 양당 교섭단체 대표 사이에 심야합의가 있었는데, 여기서 합의한 내용은 국회법 59조 위반"이라며 "법사위원장으로서 법을 위반하며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행 국회법은 상임위원회에서 법안을 의결하면 5일간의 경과기간을 둔 뒤 심사하도록 하고 있다. 상임위에서 심사한 법이 헌법과 법체계에 부합하는지, 이상한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기 위해 만든 절차다. 이 의원은 법사위에서는 숙려기간도 거치지 않은 법을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수기 노릇을 할 수 없다고 반발한 것이다. 여야 원내대표가 새벽에 합의한 법안은 아직 상임위원회에서 심의가 끝나지 않은 법안이다. 따라서 이날 각각의 상임위원회에서 의결을 하더라도 5일이 지난 뒤에야 법사위에서 법안을 심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의원의 주장이다. 기자회견 당시 이 의원은 "국회법 59조는 법안 등의 졸속부실 심사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이같은 잘못된 행태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회법 스스로 실정법을 위반하는 훼손하는 형태는 극복, 시정되어야 한다"며 "양당 원내대표가 다시 협의할 것 등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결국 여야는 법제사법위원회를 건너뛰고 법안을 심사하기로 했다. 결국 예산안과 함께 해당 법안은 국회 본회의에 올라갔다. 상임위원회에서 그동안 뜨꺼운 쟁점이었던 국제의료법, 대리점법, 모자보건법, 전공의법은 당일날 상임위에서 30분이 안 되는 사이에 심사가 끝났다. 관광진흥법은 아예 상임위 심사조차 거치지 않고 본회의로 직행했다. 해당 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반대가 격렬했기 때문이다.논란 끝에 이 법들은 본회의에 올라갔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본회의에서 "국회가 민주주의의 모범으로서 기능하도록 해야 하는 의장의 입장에서 어제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최근 이런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지금 국회는 국회의원과 상임위는 보이지 않고, 여야 정당 지도부만 보이는 형국"이라며 "교섭단체 협상 결과가 나오면 상임위와 국회의원은 그것을 추인하는 기능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원칙이 또 다시 버려진 것이다.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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