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전남도지사가 23일 오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석주관을 방문, 분향하고 있다. 사진제공=전남도
"호남 방어 최전선…민중·선비·승려 의로운 정신 계승·활용 강조" [아시아경제 노해섭 ]이낙연 전라남도지사는 23일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첫 시작점인 구례 석주관(石柱關) 칠의사묘(七義士墓)를 참배했다.석주관은 이순신 장군이 1597년 7월 원균이 이끈 삼도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 수군을 되살리기 위해 장도에 오른 역사적인 장소다. 이순신 장군이 다녀간 후 이곳을 지키던 7명의 의사가 남해, 하동을 거쳐 전라도 지방으로 진군하는 왜군을 맞아 장렬히 순절했다.이순신 장군은 이곳 석주관에서 수군 재건 구상을 하고 순천과 보성, 장흥을 거쳐 군사 120명과 전선 12척으로 수군의 전열을 정비한 후 8월 29일 진도의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후, 9월 16일 세계 해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명량해전의 대승을 거뒀다.구례 토지면 송정리에 위치한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석주관을 지키기 위해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의사(義士) 7인과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의 묘로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06호로 지정됐다.정유재란 때 광양에 상륙한 수만의 왜병이 경남 사천, 하동을 거쳐 석주관에 들이닥치자 구례현감이자 석주관만호(石柱關萬戶)였던 이원춘은 중과부적으로 적을 당해내지 못하고, 남원(南原)으로 가 결국 순절했다.이때 구례의 선비 왕득인(王得仁)이 장정 백수십 명을 거느리고 석주관을 지키려 했으나, 그도 마침내 순절했다. 왜적들이 구례에 들어와 방화?약탈을 자행하자, 구례의 선비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好誠),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王義成)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해 다시 석주관 방어에 나섰다.
이낙연 도지사가 23일 오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석주관을 방문, 이중현 석주관 칠의사원중 대표(오른쪽 두 번째)로부터 칠의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전남도
하지만 적의 대군이 하동 방면으로부터 대거 내습해오자 수적 열세로 1천여 명의 의병과 150여 명의 화엄사 승병이 일시에 순절했다. 이때 왕의성은 죽음을 면했으나, 나머지 다섯 의사는 모두 순절했다. 1805년(순조 4) 나라에서는 7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고, 1946년 지방 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을 짓고 숭의각(崇義閣)을 지어 매년 제향하고 있다.이 지사는 “임진왜란이라는 유사 이래 가장 큰 국란을 당해 호남의 민중, 선비들과 사찰의 승려들까지 의(義)의 기치 아래 모여 나라를 지켰다”며 “우리 후손들이 그 정신을 계승·활용하는데 힘을 모아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한편 전라남도는 임진왜란 당시 도내에 산재한 이순신 장군과 호남 민중의 역할 관련 사료를 수집·정리하고 있다.노해섭 기자 nogary@<ⓒ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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