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의 붓끝에 김만덕·허난설헌 살아나

자신의 설치작품 '허난설헌' 앞에 선 윤석남 작가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작업은 살아있음을 의미해요. 남에게 작가로 알려지기보다 작업실에서 끊임없이 그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작가란 한편에선 굉장히 야박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일 수 있어요. 그래도 제주의 거상 '김만덕'처럼 남의 이타적인 삶을 보면 감동이 밀려들어요. 그림이 이 사회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고 있어요."일흔이 넘은 화가의 얼굴과 말투는 소녀 같았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은 모습이 놀라웠다. 윤석남(76) 작가. 주부에서 화가로, 어느 날 갑자기 나이 사십에 늦깎이로 그림을 시작한 그는 30 여년 세월 동안 그림만큼 더욱 환해지고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큰 행복을 주는 듯 했다.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윤 작가의 전시회는 1980년대 초기작부터 올해 신작까지 총망라된 회고전 형식의 개인전이다. 윤 작가가 꾸준히 보여 온 나무를 활용한 드로잉 설치작품과 함께 4년 여 동안 천착한 그림일기, 어머니ㆍ여성ㆍ생태에 대한 기억과 생각을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시각화한 다채로운 작품 등 200여 점이 전시장을 메웠다. 작가가 미술을 시작한 뒤 그린 첫 작품은 바로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서른 아홉에 남편과 사별하고 육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워냈다. 윤 작가는 이런 어머니의 삶을 늘 위대하다고 여겼고, 행상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관찰한 뒤 어머니의 형상과 결합해 1982년 '무제'라는 그림을 완성했다. 이후 뜻이 맞는 여성작가들과 함께 '시월모임'을 결성한 뒤 1986년 전시를 열어 모든 희생을 감내하는 어머니상을 미화하는 가부장적인 사회에 비판적인 시선을 담아 '손이 열이라도'라는 작품을 내놨다. 당시 언론과 미술계에 크게 회자된 작품이다. 윤 작가는 "많은 분들이 전시회를 찾아왔다. 여성운동단체도 와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너무 무식했다. '페미니즘(feminism, 여성주의)'이란 말도 잘 몰랐다"며 "그때야 비로소 '그림이라는 게 그냥 감성만이 아니라 공부도 하고 사회도 보고 하면서 작업을 병행해야겠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했다.

작품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

작품 '이매창'

그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제와 규모가 커져갔다. 유화 그림에서 나무판자를 배경으로 한 드로잉 및 설치작 등 평면에서 입체로 나아갔고, '어머니'에서 '천 마리가 넘는 유기견' 그리고 '김만덕ㆍ허난설헌ㆍ이매방' 등 역사적 인물까지 작품의 주제로 삼는 인물들이 확장돼 갔다. 그는 "이애신 할머니가 1025마리 버려진 개를 보살피고 있는 것을 기사를 통해 알았을 때,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럽다는 생각과 함께 할머니에 대해선 자랑스러운 마음이 느껴졌다. 감동을 주는 타인의 삶을 번역하는 작업이 기쁨을 준다"고 했다. 이번 신작도 '타인의 삶에 대한 번역'이었다. 윤 작가는 "전 재산 털어서 제주도민을 먹여 살린 '김만덕'의 삶은 '눈물'이다. 슬퍼서가 아니라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적 천재성을 지녔지만 결국 이른 나이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허난설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조선의 여류시인 이매창 등의 삶을 제 나름대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67)은 "윤 작가는 당시 화단의 주류적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목소리로 여성미술계를 살찌우게 했다. 이는 특히 어머니, 환경 등을 주제로 삼아 독특한 양식으로 작품세계를 일궈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서울 중구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02-2124-8800.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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