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 폰다차의 정원, 1958년, V1115, 모란디미술관 소장
큰 원 속에 병과 세 개의 사물이 있는 정물, 1946년, 동판에 에칭, 모란디미술관 소장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이탈리아 20세기 미술거장 조르조 모란디(1890~1964년)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전시가 국내 최초로 열린다. 20일부터 내년 2월 25일까지 서울 정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다. 모란디는 어떤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았고, 근대 이후 한국미술계의 관심이 주로 미국과 프랑스와 독일에 편중돼 온 탓에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근대미술에선 프랑스 인상주의가 주로 소개돼 다양한 모던아트의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가 드물었다. 그러나 모란디는 베니스 비엔날레(1948년)와 상파울로 비엔날레(1957년)에서 수상할 만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사후에는 지속적으로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또한 영국 YBA 작가군 등 동시대 많은 예술가들에게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작가다. 이번 전시를 위해 방한한 로렌조 사솔리 데 비안키 볼로냐미술관협회 회장은 "20세기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피카소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서양 근대미술사에서 시간의 흐름이 아닌 미술양식으로 접근할 때는 모란디를 빼놓을 수 없다. 사물의 본질을 시적으로 승화하며,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한 화가다. 그가 남긴 작품들의 단순미와 예술성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혜정 학예연구사는 "근대미술에서 많은 작가들이 전통적 방식을 깨뜨리며 다양한 실험을 한 것과 다르고 모란디의 경우 과거 여러 전통양식들을 혼합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낸 화가"라며 "그의 작품에는 14세기 초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지오토, 기하학적 형태와 견고한 색채로 입체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폴 세잔, 형이상회화파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고 설명했다.
조르조 모란디. 1961년. photo by Antonio Masotti, Bologna
꽃, 1950년, 모란디미술관 소장(V.706)
작가가 작업한 흔적이 남아있는 종이, 82.5x91cm 모란디주택 소장
이 같은 모란디의 작품 경향은 그의 인생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세 명의 누이와 함께 볼로냐의 폰다차(Pontazza)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았다. 그는 침실 겸 작업실이었던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다 생을 마감했다. 2차세계대전 발발 후 그리차나로 피신한 기간을 제외하면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은둔 혹은 고립의 화가, 수도승 처럼 산 작가'로 알려져 있는 그는 그만큼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청년시절 모란디는 지오토(1267~1337년), 마사치오(1401~1428년) 등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들과 세잔(1839~1906년), 인상주의 화가들을 연구했다. 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년), 카를로 카라(1881~1966년) 등 형이상회화 작가들, 이상적인 이탈리아를 꿈꾸던 당시의 문화예술가들과 교류했으며, 오랫동안 볼로냐예술아카데미에서 에칭전공 교수로 지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이번 전시에는 볼로냐에 위치한 모란디 미술관(Museo Morandi)의 소장품 중 주로 작가의 전성기(1940년대~60년대)에 제작된 유화, 수채, 에칭판화, 드로잉 40여점이 소개된다. 작은 캔버스에는 단순화된 형태와 모노톤의 세련된 색조가 담겨있다. 이 안에는 유럽의 전통과 근대성, 지역성과 국제성, 구상과 추상, 시간과 공간, 지각과 관념의 복잡한 관계가 그물망처럼 얽혀있다. 특히 모란디는 '병(甁)의 화가'라 불릴 만큼 정물 중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병을 모티프로 한 정물화를 다수 제작했다. 또한 전시장에는 작품의 모티브가 된 정물, 조개껍질, 꽃, 풍경 등을 구분해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모란디가 선택한 일상적인 소재들은 형태, 구조, 색에서 미묘하고 아름다운 변주를 보여준다. 박 학예사는 "모란디는 벼룩시장에서 사물을 모아 병안에 페이트를 붓고 정물화를, 꽃 그림 마저 생화가 아닌 조화를, 풍경도 움직이는 대상인 인물이 없는 그림을 그렸다"며 "작품소재의 색채들은 마치 먼지가 쌓인 듯 서로 다른 색들이지만 뿌옇게 보여 비슷한 색감으로 느껴지게 한다. 이는 모두 작가가 추구한 시간이 흐르지만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뜻한다"고 말했다. “가시적인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공간, 빛, 색, 형태다”, “현실보다 더 추상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했던 모란디의 작품은 단순함과 고요함 속에서 예술과 존재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다. 거대한 크기와 거친 액션의 추상미술이 국제적으로 맹위를 떨치던 20세기 중반에조차 그의 예술이 높이 평가받고, 현재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이 영향을 주고 있는 이유다.전시장 맞은편으로는 모란디와 유사한 태도로 사물에 접근한 한국근대미술 거장들과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40여점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모란디 작품의 색감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는 박수근의 그림들과 김환기와 도상봉의 도자기와 꽃 그림 뿐 아니라 현역작가로 활동 중인 극사실주의 화가 고영훈의 작품 등이 눈길을 끈다. 또한 같은 장소에서 마리오 체멜레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조르조 모란디의 먼지'가 상영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이탈리아 수교 130주년과 서울시-볼로냐시의 업무협약(MOU) 체결을 기념한 행사이기도 하다. 02-2022-0600.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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