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터키의 아라랏산.
방주(方舟)라는 말은 신비하다. 방(方)은 사각형을 의미한다. 정방(正方)은 네변의 길이가 똑같은 정사각형이다. 방주는 사각형 배라는 뜻인데, 배의 평면도가 정사각형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입방체(立方體, 육면체) 형태의 배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흔히 보아왔던 배의 형태, 즉 물고기처럼 유선형(流線型)을 하고 있으며 배의 위쪽은 넓고 아래쪽은 좁은 모양과는, 무척 다른 형태이다. 그냥 궤짝같은 것이 물에 떠있는 형상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방주의 영어는 아크(ark)인데, 그 이후로 별로 이런 표현을 쓸 일이 없었던 까닭인지, 고유어처럼 쓰이고 있다. 방주가 유선형 모양을 하고 있지 않은 까닭은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직육면체인 까닭은 뒤집혀도 침몰되지 않도록 내부 밀폐형으로 설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폭풍우의 바다 위에서 다만 오래 견디기 위해 만들어진 배가 바로 방주이다.
'노아의 방주'가 머문 것과 유사한 흔적이 발견돼 관광지로 개발된 터키 아라랏산의 중턱.
노아의 방주는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스토리이다. 인간의 타락과 불손에 분노한 신은 대홍수로 심판할 뜻을 굳히고, 유일하게 신이 인정하는 선인(善人)인 노아에게 심판에서 제외할 존재를 튼튼한 배에 실어 구하라고 명한다. 방주에 탑승한 인간은 8명이었다.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셈, 함, 야벳)과 그들의 아내들이다. 또 정결한 짐승 암수7쌍, 부정한 짐승 암수2쌍, 새 암수7쌍을 싣도록 했다. 부정한 짐승을 적게 실은 것은, 그것들을 비난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번식력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배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는데, 목재는 고펠나무를 불리는 전나무를 썼고, 길이는 135미터, 폭은 22.5미터, 높이는 13.5미터 정도가 되는 거함이었다. 안팎으로 타르칠을 해서 물에 오래 견디도록 했으며 지붕과 문을 달았다. 노아는 120년에 걸쳐서 이 배를 만들었고 완성했을 때의 나이가 600살이었다. 대홍수는 375일간 하늘의 뚜껑이 열린 듯 비를 퍼부은 어마어마한 재앙이었다. 노아는 방주 속에서 이 시련을 결국 이겨낸다. 신화는 그저 이야기일 뿐인가. 저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아닌가. 인간과 신이 직접 소통하던 시대의 스토리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다. 선박 건조에 정통한 전문가는 목선을 100미터 이상의 크기로 만드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중국의 한자에서 배를 가리키는 선(船)은 주(舟)+팔(八)+구(口)로 이뤄져 있는데, 방주에 탔던 여덟 식구를 말한다고도 한다. 인도신화, 남미 잉카신화, 이슬람경전에는 모두 대홍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는 아라랏산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터키의 아라랏산(나도 작년 여행에서 그곳을 지나가며 보았다. 우리나라 ‘아리랑’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의 눈과 화산재에 파묻힌 대형 목재구조물의 흔적이 2009년 발견되어, 이것이 방주의 자취라는 의견이 나왔다. 현재 아라랏산 중턱에는 ‘노아의 방주’를 기념하는 관광시설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결정적인 것은 1850년 앗시리아(기원전 7세기) 앗시르바니팔 왕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12장의 점토판이다. 거기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노아의 방주와 똑같은 방주 이야기가 나오고, 대홍수에 대비하여 그것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거기에 나오는 방주는 3600평방미터의 크기에 높이 60미터, 6층의 목선이다. 영화감독 다렌 아르노프스키(Darren Aronofsky)는 2011년 만화 ‘노아의 방주(noe)’를 출간해 큰 호평을 받았다. 그 인기에 힘입어 그는 2014년 영화 ‘노아’를 만들어 개봉했다. 이 작품은 아르노프스키의, 신과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이며 노아를 내세운 거침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노아’를 등장시켰지만 창세기의 역사를 재현해내서 시간을 넘나드는 맛을 즐기려고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이성적 필터 없이 우리에게 심어져온(그래서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해왔던) 체험 이전의 선험적 기억을, 현실 앞에 데리고 와서, 그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영화 '노아'의 한장면
노아(러셀 크로우)는 ‘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며 ‘구제받을 만큼 신앙이 독실한 인간’이라는 성서적 설정은, 영화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 그는 다만, 신의 심판을 돕는 ‘충직한 집행인’으로 그려진다. 신에게 방주의 귀띔을 받은 노아는,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던 사람이었던가. 영화는 노아에게 그런 지위도 주지 않았다. 그 또한 신의 심판 아래에 있는 자이며, 자신이 들은 만큼 실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살아남은 인간으로 자손을 번창시킬 권리를 누렸는가. 성서는 그와 세 아들이 모두 부부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영화는 아들들의 ‘결합’을 문제 삼는다. 둘째 아들 함(로건 레먼)은 직접 밖으로 나가 짝을 찾아왔지만 아버지 노아가 비정하게 방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셋째 야벳은 아예 짝이 없다. 첫째 셈(더글라스 부스)은 사지(死地)에서 구출해 식구가 된 일라(엠마 왓슨)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는 배에 상처를 입었던 까닭에 불임(不姙)이다. 노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은 짐승들은 죄가 없기에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자손을 볼 수는 없다. 나와 아내가 죽으면 셈과 일라가 그 장례를 치르고 셈과 일라가 죽으면 함과 야벳이 다시 그들의 장례를 치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영화 '노아'의 한장면.
대홍수의 심판에서 인간에게 자손을 번창할 수 없도록 징벌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해석’이다. 신이 노아를 사랑해 그들이 다시 인간의 씨를 뿌릴 수 있도록 해준 것이 아니라, 그들 당대까지만 살고 혈육이 없이 죽도록 징벌을 유예해준 것이다. 방주는 선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베푼 것이 아니라, 인간을 절멸시키는 신의 스케줄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인간이 짐승들의 번식을 유지하도록 하는 미션을 맡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신의 이같은 계획에 대해 인간은 저항했다. 가장 원초적이고 말초적으로 저항한 사람은 카인의 후예라는 ‘두발가인(레이 윈스턴)’이다. 그는 신이 인간과의 소통을 끊었다고 생각하고, 인간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믿는 사람이다. 사람들을 선동해 군대를 조직하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고 한다. 신이, 가장 타락했다고 믿는 그런 인간종자일 것이다. 그는 결국 방주까지 침투해 들어왔고 둘째 아들 함을 유혹해 노아를 죽이려 한다. 함에게 그는 독립적으로 사는 삶을 남자다움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결국 신의 날벼락과 함의 칼에 죽는다. 둘째 아들 함도 저항했다. 왜 자신과 막내 야벳은 짝이 없느냐고, 우리는 이렇게 외롭게 살다 가도 되느냐고 노아에게 따졌다. 노아는 그러나 아들에게 단호하게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한다. 함은 방주를 뛰쳐나가 직접 소녀를 구해 오지만, 노아는 그녀를 가차없이 떼어버린다. 함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분노를 키운다. 두발가인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라고 유혹하자 그는 칼을 들고 그 일에 참여까지 한다. 첫째 아들 셈도 저항했다. 일라가 임신하자, 노아는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키우게 하겠지만 딸을 낳으면 그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말한다. 딸은 다시 자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셈은 방주에서 작은 배를 띄워 아버지의 전횡에서 탈주하고자 했다. 그 배를 불태워버렸을 때 아들의 절망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자신의 새끼를 죽이려는 아버지.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이다. 그도 한순간 아버지를 죽이러 달려갔으나 실패한다.
영화 '노아'의 한장면.
가장 격렬히 그리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아내 나메(제니퍼 코넬리)였다. 노아와 나메의 부부싸움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부싸움일 것이다. 신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충돌한, 이 부부싸움에서 결국 이긴 것은 여자였다. 그 ‘여자’는 바로 ‘미래를 잉태하는 인간’이다. 나메는 시할아버지인 므두셀라(안소니 홉킨스)를 찾아가(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이 존재를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다), 노아의 문제를 얘기하고 해결책을 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시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 선택권은 노아에게 있는 거니까, 하는 수 없지. 내가 처방을 해보긴 하겠지만, 그것에 대한 선택권도 또한 노아에게 있어.” 이 아리송한 말은 불임의 일라를 임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할아버지가 영화 내내 ‘베리(딸기)’를 먹고싶어 하는 것은, 임산부가 엽산 때문에 딸기를 찾는 것을 함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하튼 므두셀라는 일라의 몸을 만져 상처를 낫게 해준다. 불임에서 벗어난 그녀는 셈을 만나 격하게 사랑을 나누고 결국 임신에 성공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노아의 아내 나메의 힘이었다. 일라가 쌍둥이 딸을 출산했을 때, 이 가족들의 갈등은 극에 이른다. 노아는 칼을 들고 손녀를 죽이러 배 위로 올라간다. 일라는 두 딸을 품고 울고 있다.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그녀는 자장가를 불러줄 시간을 달라고 한다. 그 참극의 와중에 어머니가 된 여인이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자 노아는 다시 칼을 들고 다가선다. 품에 안긴 귀여운 아기에게 칼을 겨누다 노아는 돌아서고 만다. 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중얼거린다. “이 일은 못하겠습니다, 도저히.” 노아는 신에게 받은 미션을 수행하지 못한 자책에, 그 뒤에 오래 스스로를 감금하며 괴로워한다. 어느 날 아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신의 뜻을 배척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것을 결정하도록 한 것, 그것이 신의 뜻이 아니었을까요. 인간이 절멸되어야할 존재인가, 아니면 다시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아 생명을 이어가야할 존재인가. 그것을 고심하며 결정하라고 신이 그렇게 맡긴 것입니다.” 이 감동적인 해석이 영화의 백미를 이룬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제작한 만화 노아(NOE)의 한장면.
이 영화에는 네피림이 등장한다. 이 존재는 창세기에 나오는 것으로, 신의 존재가 인간의 여자와 결합하여 낳은 자손들인데, 신의 버림을 받아 지상을 헤매고 있는 거인족이다. 이들은 인간을 증오하고 살아왔으나 노아가 신의 뜻을 받드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그의 방주 제작을 도와준다. 내가 보기엔 돌로된 트랜스포머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돌거인들은 방주를 공격하는 인간들을 맞아 싸우는 역할도 한다. 이들은 모두 격렬한 전쟁에서 희생되어 아름답게 승천한다. 감독이 현실적으로 네피림을 동원한 까닭은, 120년에 걸쳐 지었다는 방주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 8명이 나무를 자르고 붙여서 만들었다면 참으로 지루하고 따분하지 않았겠는가. 트랜스포머라도 등장해 지어주는 게 훨씬 그럴 듯 해보인다는 걸 감독도 계산했으리라. 이 영화를 보면서, ‘흠’을 찾는 일이라든가, 문제점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굳이 영화 비평가가 될 필요가 있겠는가. 대신 인간 절멸을 선언한 신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처절하고 집요한 전투를 음미하며 지금 삶과 존재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영화 한편이 그런 심오함에 이르게 해줄 수 있다면 말이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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