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편리함의 대가

'완고하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융통성 없이 올곧고 고집이 세다'라고 나와 있다. 사춘기 소녀들에게 '왕짜증'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상위 3위 안에 어김없이 들어감 직한 낱말이다. 어디 사춘기뿐이랴. 오십 줄에 접어든 지 한참이지만 지금도 사회 도처의 딱딱한 벽에 부닥치면 답답하고 짜증 나기는 마찬가지다. 그중 대표적인 게 금융인데 어찌나 빡빡하고 융통성 없는지 은행 문을 들어서려면 매번 심호흡 한 번 크게 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 않고 학계에 보고되지 않아서 우리가 잘 모를 뿐이지 아마 하루에도 수백만 이상이 '금융발 호흡곤란' 또는 '은행성 심근경색증'으로 병원에 실려 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고통받던 자유영혼들이 나름대로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수표도 써보고 어음도 발행해 답답함을 일부 덜었던 것인데 급기야 신용카드가 등장하면서 이 땅의 금융에도 비로소 숨통이 트이게 된다. 1원짜리 동전 하나까지 시시콜콜 따져대던 은행들이 어찌된 셈인지 경쟁하듯 '플라스틱 머니'를 남발했고, 정부도 세금혜택과 신용카드영수증 복권까지 동원해 카드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나섰다. 버스, 지하철, 택시요금에 껌값, 담뱃값까지 카드로 결제하는 말랑말랑한 세상이 된 것이다. 원더풀 뉴 월드! 원더풀 코리아! 이 멋진 신세계는 마냥 즐겁고 자유롭다. 달랑 신용카드 한두 장 지갑에 꽂고 나가면 뭐든 못할 게 없고(동전지갑은 내다 버린 지 오래고 지금 쓰고 있는 '뒷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지갑도 얼마나 작고 간편한지!), 완고하고 고지식한 은행원 얼굴 안 봐도 웬만한 은행일은 다 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웬만한 불편은 참기로 했다. '말이필요없다 직접느껴보라 즐거운명절 쪼아와함께 첫10%추가' '가만히 있는다고 돈벌이 안돼요! 여기 들러봐요 최곱니다' '아침엔 서든 점심엔 세컨 저녁엔 골프 신 바두기 명절무료 1만' 등에 이어 '하루종일 스팸에 시달리셨죠? 염치불구하고 보냅니다. 무료 2만 코리아카지노'까지. 설연휴 내내 하루 10통 이상씩, 그것도 주로 이른 새벽에 이런 해독하기도 힘든 괴문자들이 휴대폰을 습격하고 있지만, 아직은 참아야 한다. 편리함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만약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다면 그 누구라도 완고함이 그리워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금융이 완고해진 건 아닐까. <치우(恥愚)><ⓒ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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