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14장 흐르는 강물처럼(239)

“그럼 가요! 저 뒤에 라면도 팔고 순대도 파는 집이 하나 있으니까.” 소연이 앞장을 서면서 말했다. 팔랑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노랑머리보다는 그래도 파마한 까만 머리가 더 나았다. 그것은 그녀 역시 반항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뜻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 열병처럼 지나가게 마련인 시절.... 노랑머리..... 살구골로 찾아가던 지난 겨울,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오뉴월 땡볕 삼일이 무섭다더니 철없이 깔깔거리던 그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 보였다. 소녀스런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여자스런 느낌이 들었다.소연이 하림을 데리고 간 곳은 골목 안 허름한 집이었다. 골목 쪽 창 밖으로 오뎅과 떡볶이를 끓이는 함지를 걸어놓고, 안에는 양철로 된 탁자와 등 없는 둥근 간이용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분식도 팔고, 술도 파는 그런 곳이었다. 소연은 이런 덴데 괜찮겠느냐 눈으로 물었고, 하림은 괜찮다는 표시로 서양인처럼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뭐든 시켜요. 여긴 내가 다 사줄 수 있으니까.” 자리에 앉자 벽에 붙은 메뉴를 보며 소연이 큰소리를 쳤다. “됐네요. 돈은 내가 낼테니까 소연이가 시켜.”“라면.....?”“순대랑 소주도 하나 시켜줘.”“늙은 아저씨처럼....?” 소연이 깔깔거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어느새 예전의 장난스런 소녀로 돌아와 있었다.“그래. 나 늙은 아저씨다. 어쩔래?” 인상을 한번 푹 긁으며 하림 역시 장난스럽게 대들듯이 말했다. “알았어요. 아줌마! 여기 라면 두 개 하구요, 먼저 순대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소연이 활기 찬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그리곤 하림과 눈이 마주치자 습관처럼 씽긋하고 웃었다. 하림은 그런 그녀가 왠지 모르게 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랑 같이 앉아있는 이런 허름한 집도 편했고, 이런 분위기도 편했다. “만났어요?”“누구....?” 소연이 대뜸 물었고, 하림은 알면서도 되물었다. 혜경이 말일 터였다. 앉자마자 그녀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담은 하림에 대한 궁금증 때문일 것이었다.“언니 말이예요. 하림 오빠 오길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그 사람.” 말은 여전히 장난스러웠지만 탐문자의 복선이 깔려있었다.“지랄. 누가 날 그렇게 눈이 빠지게 기다린대...?” 하림이 과장된 표정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하림의 얼굴에 한가닥 쓸쓸한 그림자 같은 게 스쳐지나갔다. 순대와 소주가 나왔다.“아직 못 만났어.” 하림이 천천히 말했다. “왜요....?” 소연이 궁금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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