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한지 꼭 20년이 지났다. 당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주문했던 이 회장은 이번에는 격으로서의 성장을 제시했다. 그는 7일 세계 각지의 임직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낡은 의식과 제도,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관행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양 위주의 생각과 행동을 질 중심으로 바꾸어 경쟁력을 키웠다"며 "지난 20년간 양에서 질로 대전환을 이루었듯이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 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3년과 2013년의 삼성을 비교해보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전자관련 계열사들의 세계 1등 품목은 11개에 달한다. 반도체를 비롯해 TV, 스마트폰 등 하나같이 최첨단 주요 제품들이다. 올해 이 회장은 어느때보다도 긴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하와이와 일본을 오가며 3개월 동안을 해외에 있었다. 석달간의 해외 출장을 다녀온 이 회장은 신경영 20주년 소감을 묻는 질문에 다시 '위기'를 얘기했다. "20년이 됐다고 안심해서는 안되고 모든 사물, 인간은 항상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하고 더 열심히 뛰고 더 사물을 깊게 보고 멀리 보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지난해부터 삼성은 사상최대 실적을 연일 경신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축제 분위기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 회장이 다시금 위기를 강조하며 삼성 내부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신경영 20주년을 맞은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대신 신경영 당시의 위기의식과 세계 초일류라는 경영목표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다. '2013 신경영'의 실체다.◆신경영 20주년을 맞은 이건희 회장 "지금이 진짜 위기"= 1993년 당시 우리 경제에는 앞날을 쉽게 예단하지 못할 정도로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1992년은 80년대 이래 최저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부진했고 세계경제도 미국만 성장세를 다소 회복했을 뿐 대부분의 국가들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해 수출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3대에 걸친 군사정권에서 마침내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 분위기는 새 정부출범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정권교체에 따른 불안감이 가득했다. 20년이 지난 2013년 현재를 살펴보면 1993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발 금융위기는 지금도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일부 유럽국가의 모라토리엄 위험은 아직도 존재한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보호무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아베 정권이 들어서며 금융완화에 나섰다. 엔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며 일본 제품들의 가격 경쟁력이 급상승하고 있다. 중국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에서 벗어나 기술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불안한 세계 경제속에서도 삼성은 세계 휴대폰 1위를 거머쥐었다. 반도체, TV는 수년째 1위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 진짜 위기다. 지금까지 삼성은 선도 업체들을 발빠르게 쫓아가는 것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이상 쫓아갈 상대가 없다. 이 회장이 사상 최대 실적에도 "잘했다"는 말 대신 "다시 위기"라고 말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2030 세대에게 '신경영' 가르치는 삼성= 이 회장의 이같은 위기의식은 삼성그룹 경영진 전체가 갖고 있는 생각과도 같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새벽 6시 30분 출근을 고집하고 있다. 그룹의 사령탑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실의 위기의식은 상당하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신경영 20주년을 맞아 삼성전자를 비롯한 전자계열사들은 초일류 기업이라는 목표를 일부 달성했지만 반도체, 스마트폰을 비롯한 특정 사업에 이익이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면서 "비 전자계열사의 경우 글로벌화가 시급한 상황으로 실제 위기감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경영진 대다수는 1993년 당시 신경영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변화의 물결에 동참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최근 입사한 2030 세대들은 책과 교육을 통해 신경영을 접했을 뿐이다. 신경영 당시의 절박한 위기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삼성은 2030 세대를 위해 1993년 당시 신경영을 2013년 현재에 맞춰 재해석해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도약의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5일과 7일 사내방송을 통해 방영된 '신경영 20주년 SBC 특별방송'이다. 5일 방송된 1부에서는 신경영의 배경과 국내외 성과를 조명했고 7일 방송된 2부에선 신경영의 체계도를 인문, 경영, 사회학적으로 재조명했다. 여기에 더해 10일부터 수원 디지털시티에서 열리는 '이노베이션 포럼'에선 삼성전자의 지난 20년사를 조명하고 초일류 상품들에 향후 시장 선도 방향을 모색하는 기회를 가진다. 이와 함께 삼성그룹은 신경영 당시 경영진들을 초빙해 테마별로 세미나를 가진다. 세미나는 품질경영, 디자인 등 이 회장이 신경영 당시 강조했던 주요 테마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주제는 '혁신'이다. 1993년 시작된 신경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1993년에는 품질을 높이기 위해 신경영에 나섰다면 이제는 혁신이 신경영의 주제다. 삼성이 신경영 20주년을 맞아 '2013 신경영' 운동에 나서는 배경이다. ◆삼성인력개발원, 신경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1993년 신경영의 밑그림을 그렸던 용인 에버랜드에 위치한 삼성인력개발원도 '2013 신경영'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삼성인력개발원에서는 올해 '혁신'을 주제로 한 신경영 교육에 나설 계획이다. 신입사원과 승진자, 임원들의 교육 과정에는 신경영을 토대로 한 이 회장의 경영철학이 포함돼 있다. 지난 2011년 리노베이션을 통해 재 개관한 창조관은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다. 내부에는 유명 미술가의 그림과 동상, 설치 미술들이 놓여 있다. 회의실이나 휴게실에 놓여있는 테이블과 의자들은 전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이다. 창조관 내부는 벽면, 바닥, 천정을 비롯해 단순한 소품 하나도 모두 의미를 담아 만들어졌다. 신경영에서 강조한 부분은 '변화의 생활화'였다. 새로운 신경영은 '혁신의 생활화'다. 창조관에서는 삼성전자의 최첨단 제품들과 이병철 선대 회장 당시부터 수집한 예술작품들이 가득하다. 내부 인테리어는 사소한 것 하나도 의미를 담았다. 창조관에서 자연스럽게 교육을 받으며 기술과 문화를 느끼고 그 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게 구성한 것이다. 신경영 당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의 회의장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쪽에 위치한 TV 화면에서는 당시 이 회장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다. 모든 것을 바꾸라며 외치는 이 회장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당시 회의실을 옮겨 놓은 까닭은 이건희 회장의 특강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며 "신경영은 삼성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했다. ◆신경영의 유산 '싱글', 이제는 그룹 중추시스템으로= 신경영 당시 이 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정보의 체계화와 이를 공유하는 문화였다. 1993년 3월 동경 회의에서 이 회장은 기록하는 문화에 대해 강조한다."지나간 정보는 쓰레기고 살아 있는 정보가 참 정보다. 정보는 돈과 직결된다. 평소 사소한 정보라도 축적하고 PC에 넣어 한곳에 모으고 정보 공유도 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모으면 큰 정보가 된다고 수없이 얘기했다. 우리나라의 정보수준은 낮다. 소위 기록하는 문화가 없다. 고려 이후 800년, 조선 초기 등 기록문화가 없다."이 회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공유체제 구축을 추진했다. 1989년 1월에는 통합정보관리시스템인 토픽스(TOIPCS)를 개통했다. 1993년 9월 신경영 사무국은 '토픽스'를 그룹 전체로 확산시켰다. 토픽스에는 그룹의 모든 정보가 모이고 공유되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은 신경영 선언 이후 토픽스가 가진 시스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개선작업을 추진했다. 1994년 4월 그룹통합망 구축 태스크포스가 발족됐으며 95년 8월 싱글 시스템 개발을 완료하고 그 해 10월 개통했다. 이후 2002년 웹기반으로 '마이싱글'을 개발해 전세계 임직원들과의 실시간 소통 및 업무 처리가 가능해졌다. '마이싱글'은 이 회장의 신경영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지난 20여년간 싱글은 끊임없이 발전하며 삼성그룹 경영의 중추 역할을 해왔다. 다른 기업보다 빨리 도입한 덕에 삼성그룹은 그룹 전체의 정보를 종합 관리하고 공유하는 한편, 새로운 신경영을 위해 임직원들이 함께 호흡하는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인력개발원이 신경영 당시의 위기감과 세계 초일류를 향한 목표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심어주고 있다면 싱글은 정보 공유에서 벗어나 임직원들간의 소통의 장으로 발전하고 있다"면서 "신경영 최대의 유산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신경영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명진규 기자 aeo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산업부 명진규 기자 aeon@ⓒ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