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경제와의 전쟁 <上> 불법 사설 경주 숨가뿐 숨바꼭질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지난해 국민체육진흥공단 단속반의 불법 사설 경주 도박판 단속 현장.
"아뿔싸, 놓쳤구나!".지난 7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 한 오피스텔을 덮친 국민체육진흥공단 소속 불법 사설 경정 단속반 직원의 입에선 아쉬운 탄식이 흘러 나왔다. 분명히 여러 명이 모여 불법 사설 경정(속칭 맞대기) 판을 벌이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경찰을 불러 현장을 급습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잠깐 사이에 현장이 깨끗하게 치워진 채 집주인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성만 달랑 남아 있는 것이다.직원들이 현장을 덮치기 위해 도착한 순간 오피스텔 문이 열려 있던 것 부터 수상했다. 미처 끄지 못한 컴퓨터는 불법 도박 사이트에 접속돼 있었고, 여러 명이 커피와 음료수를 마신 흔적이 남아 있는가 하면 수상한 메모가 발견되는 등 '맞대기'판이 벌어진 흔적은 역력했다. 경정 일정표가 발견됐고, 집주인이라는 40대 남성도 식은 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는 등 당황한 기색이 뚜렷했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물인 돈을 건 내역이 적혀 있는 종이 쪽지 등은 보이지 않았다. 불법 도박 사이트도 로그아웃된 상태였다. 집주인은 출동한 경찰에게 "심심해서 경정이나 한 번 가볼까 하고 인터넷으로 정보만 봤을 뿐 불법 사설 경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둘러 댔다. 결국 '맞대기'의 흔적만 발견했을 뿐 뚜렷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단속반은 출동한 경찰들과 허무하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특별사법경찰권 등 직접 단속할 수있는 권한이 없는 게 한이었다. 돌아 나오던 한 단속반원은 "경찰을 불러 출동하는 동안 시간이 지체 돼 도박꾼들이 눈치를 채고 빠져나간 것 같다"며 "도주 방지 및 증거물 인멸을 막기 위해 각자 역할 분담을 한 후 은밀하게 접근해서 문을 열게 해 덮쳐야 하는 데 오늘같은 단속 실패는 5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탄했다.◇ 갈수록 기승 부리는 불법 사설 경주 시장 비록 실패했지만 이날 단속반이 단속에 나선 것은 최근 들어 이와같은 불법 사설 도박판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단속반이 지난 2012년 한해 동안만 적발한 것만 총 9개 조직 37명에 달한다. 이들을 통해 베팅된 금액만 해도 약 500억 원대로 추측된다. 현장 단속 실적은 지난 2005년 2건, 2006년ㆍ2007년 3건 등 소수에 그치던 것에 2008년(4건) 이후 늘어나기 시작해 2009년 6건, 2010년 8건, 2011년 10건 등으로 급증하기 시작했다. 검거 인원도 2007년 26명에서 2008년 45명, 2009년 55명, 2010년 74명, 2011년 75명 등으로 늘어났고, 판돈도 2007년 1911억원, 2008년 1717억원, 2009년 2017억원, 2010년 2200억원 대 등 최근 6년간 총 8000억원~1조원대로 추측되고 있다. ◇하우스형ㆍ인터넷형ㆍ객장형 등 유행단속되는 불법 사설 경주판의 유형은 3가지 정도다. 우선 '하우스형'이 있다. 이날 단속반에 의해 급습당한 이들처럼 아파트ㆍ오피스텔 등 은밀한 장소에 도박꾼들을 불러 모은 후 현장 전화 또는 불법 도박 사이트 등을 통해 중계되는 경정 방송을 시청하면서 우승 선수를 예상해 돈을 걸게 한 후 경주 결과에 따라 배당금을 나눠주는 수법을 쓴다. '인터넷형'도 최근들어 급속히 늘어나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인터넷 상에 사설 경정 사이트를 개설한 후 미리 연락된 도박꾼들로부터 현금을 입금받는 방식으로 베팅을 하게 한다. 이후 경정 경주 결과에 따라 배당금을 나눠주고 남는 돈을 챙긴다. 인터넷형 사설 경정꾼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공단 단속반에 의해 차단ㆍ폐소돼된 온라인 경정 베팅 사이트는 2005년ㆍ2006년 각 1개 등 미미했지만 2009년 138개, 2010년 145개, 2011년 154개 등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08년 관련 법이 개정돼 공단 측이 운영하던 합법 온라인 베팅 사이트가 폐쇄된 후폭풍이었다. 예전에는 공단이 운영하는 경정장 또는 지점에서 사람들을 모아 사설 경주를 하는 '객장형'도 있었지만 워낙 단속이 심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추세다. ◇ 범행 수법 은밀화ㆍ기업화ㆍ폭력화 특히 최근들어 불법 사설 경정꾼들의 범죄 수법이 더욱 은밀화ㆍ기업화되고 있다. 조직폭력배들이 운영하는 기업형 조직들이 등장해 인터넷형ㆍ하우스형을 혼합해 운영하면서 소규모 점조직을 통해 도박장을 운영해 검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친구나 지인 등을 도박장으로 데려와 소개시킬 경우 수수료를 주는 중간 알선 조직(롤링조직)도 대거 등장하는 추세다. 특히 지인들끼리만 접속할 수 있도록 회원제 방식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돈 거래도 철저히 현금이 아니라 차명계좌를 활용한다. 전화도 대포폰을 이용하기 때문에 추적이 힘들다. 인터넷 사이트 운영 서버를 해외에 두거나 다른 조직을 통해 대신 운영하는 등 직접적인 처벌ㆍ단속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첨단 장비와 무기로 무장한 사설 경주꾼들은 출입구와 진입로에 CCTV나 탐지기를 설치해 단속 인력이 들이닥치기 전에 증거를 인멸하는 경우가 많다.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거나 맹견을 풀어 놓는 경우도 많다. 진압 과정에서 단속반에게 폭력ㆍ흉기를 휘두르는 경우도 있고, 이성을 잃고 자해하거나 고층 빌딩에서 투신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 경마ㆍ경정ㆍ경륜 등 최대 100조원대 시장 이같은 불법 사설 경주는 경정 뿐만 아니라 경마, 경륜 등에서도 성행하고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2009년 자료에 따르면 불법 사설 경주의 규모는 경정이 약 3880억원, 경륜은 1000억원 가량이다. 그나마 이것도 추정치에 불과할 뿐 실제 사설 경주 시장의 판돈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여기에 경륜ㆍ경정보다 매출액이 훨씬 큰 경마까지 포함할 경우 연간 최대 100조원 가량의 불법 사설 경주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경정ㆍ경륜만 해도 불법 사설 도박판의 판돈이 연간 1조원대의 이르러 정부가 공인한 사업 매출 목표 7600억원대를 훨씬 초월할 정도로 불법 사설 경주가 판을 치고 있다. 도박꾼들이 국가가 운영하는 경마ㆍ경정ㆍ경륜장을 외면한 채 불법 사설 경주에 빠지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수수료가 없다. 경마ㆍ경정ㆍ경륜 모두 국가가 운영하는 곳에선 30% 가량의 수수료를 떼지만 사설 경주 도박판에선 받지 않는다. 또 판돈을 제한하지 않아 '대박'을 노리는 도박꾼들이 몰린다. 한판에 10만원 밖에 걸지 못하는 국가 운영 시설에서 답답증을 느낀 도박꾼은 사설 경주 도박판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속칭 '개평', '뽀찌'라 부르는 보너스 머니 등 서비스도 푸짐하다. 예컨대 1000만원을 잃은 사람에게 국가 운영 시설은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지만, 이들은 200~300만원을 차비 조로 건네주며 위로하고 다음 판으로 오도록 독려한다.국민체육진흥공단 경정사업본부 경정공정팀 관계자는 "불법사설 경주는 세금을 내지도 않고 공익 기금에 기여하는 부분도 전혀 없어 국가적으로 보면 엄청난 재정적 손실이 발생한다"며 "무엇보다 수익이 범죄 조직으로 흘러들어가고, 개인의 경우 가산 탕진으로 이어지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이므로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단속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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