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계단 오르니ㆍㆍㆍ겨울이 내려오네

문경 대승사 묘적암, 윤필암 가는길-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겨울 문턱 낭만 가득

[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암자로 드는 숲길은 고즈넉하다. 잎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초겨울의 차가움이 살포시 내려 앉았다. 늦은 오후 햇살을 받은 길손의 그림자가 융단처럼 깔린 낙엽 위에 길게 늘어진다. 바스락, 바스락 두툼히 깔린 낙엽을 밟고 숲속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구름위를 걷는 듯 푹신하다. 길섶의 낙엽을 헤치는 다람쥐가 길동무를 자청한다. 아름답고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숲길을 따라 낙엽비가 흩날린다. 11월 중순을 훌쩍 넘어섰다. 이쯤은 곳곳에서 첫눈 소식이 들려올때다. 단풍은 벌써 떨어져 낙엽이 되어 바람에 뒹굴며 흙길을 뒤덮는다. 가을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겨울이 왔다고 하기에도 뭔가 아쉽다. 그래서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마지막 만추(晩秋)를 찾아 경북 문경의 숲길을 걸었다. 사불산 자락의 대승사 부속암자인 묘적암과 윤필암에서 고즈넉한 낙엽길을 밟았고,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 흙길을 지나는 문경새재에서 조선시대 과거길을 떠올렸다. 문경에서 '길'이라면 가장 먼저 새재 옛길을 떠올리겠지만 그보다 더 빼어난 길이 대승사에 있다. 길이 가진 역사성이야 문경새재를 당할수 없지만 고즈넉한 길의 정취로는 윤필암, 묘적암으로 이어진 숲길이 훨씬 좋다.윤필암은 곧바로 차로 가 닿을 수도 있지만 대승사 대웅전 옆으로 난 산길을 택하는 편이 운치는 낫다. 산자락을 따라 20여분을 가면 윤필암과 사불(四佛)바위 갈림길이 나온다. 이 길에서 바로 윤필암으로 내려서지 말고 사불바위 쪽으로 올랐다.

윤필암

묘적암과 윤필암을 품은 사불산의 이름은 산 중턱 거대한 암반 위에 서있는 사불바위에서 유래됐다. 이제는 거의 닳아 없어진 마애불이 4개의 면에 새겨진 바위다.삼국유사에는 '붉은 천에 싸인 바위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졌고 그 네 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신라 진평왕이 몸소 찾아와 예를 올리고 대승사를 창건했다'고 적고 있다. 사불바위에 오르면 시선에 거칠 것이 없다. 좌우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사불바위를 보호하려는 듯 등 뒤로 빙 둘러쳐져 있다. 발아래로는 윤필암의 단아한 법당들이 펼쳐지고 맞은 편 산자락의 8분 능선쯤에 소박한 암자 묘적암이 그림같은 풍경으로 앉아 있다. 단풍철이 한 참을 지났지만 암자 주변으로는 아직 여름의 푸르름이 남아 있어 이색적이다. 윤필암은 우리나라에서 비구니 선원으로 두번째로 문을 연 비구니 참선 수행 도량이다. 수덕사 견성암, 오대산 지장암과 함께 3대 비구니 선원인 셈이다. 고려시대 의상대사의 이복동생인 윤필거사가 수행했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구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윤필암을 나서 숲길을 따라 터벅터벅 묘적암으로 오른다. 숲은 깊었고 나무들은 높았다. 이따금 바람이라도 불면 낙엽비가 쏟아져 내린다. 사각이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5분 가량 오르면 묘적암 가는길에서 가장 운치있는 곳을 만난다. 숲길 오른쪽으로 돌계단이 놓여져 있다. 온통 낙엽으로 뒤덮인 돌계단 길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듯 부드럽게 휘어진 곡선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짧은 길이지만 전해지는 감동의 여운은 길다.한 발 두발 낙엽쌓인 돌계단을 따라 오르자 끝에 6m 높이의 거대한 마애불이 나타났다. 가부좌를 튼 마애불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늦가을 햇볕을 받고 있다. 묘적암으로 향하는 길은 아늑한 숲길이다.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우뚝 솟아 있고 발밑에는 낙엽들이 기분 좋게 서걱거린다. 산속의 암자로 오르는 길은 그 자체로 선(禪)에 드는 길이다. 한발 두발 걸으며 내 몸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자연이 내는 소리에 이입되는 시간이니 말이다.묘적암은 고려 말의 나옹선사가 출가한 곳이다. 성철, 서암 등 현대의 고승들도 깨달음을 얻고자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묘적암

암자에 들기 전 오른쪽 산기슭에는 부도가 2개 있다. 처음 것은 기우뚱한 모습인데 뒤쪽의 것은 좀더 의젓한 모습으로 서있다. 앞에 것은 동봉선사, 뒤쪽은 나옹선사의 부도라 한다.마지막 모퉁이를 올라섰다. 두툼한 낙엽 카펫 위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치고 들어오자 오솔길은 황금빛으로 빛이 났다.고목너머로 보이는 묘적암이 눈에 들어온다. 흙담에 소박한 대문을 한 암자는 여느 시골집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입구 팻말에 이곳은 선원이니 출입을 삼가해달라고 써있다. 정진하는 스님의 깨달음을 방해할까봐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흙벽 담에 둘러싸인 집은 기와를 얹은 대문에 불이문(不二門)이란 이름표를 달고 서 있다.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허리를 낮춘 해우소가 앉아 있다.
묘적암 마당 가운데는 나옹선사에 대한 전설을 담은 돌이 놓여 있다. 나옹선사가 하루는 상추를 씻던 중 해인사에 불이나자 상추 씻은 물을 해인사로 뿌려 불을 껐는데 늦게 온 나옹을 꾸짓자 그 자리에서 도술을 부려 물방울을 바닥에 내리치고 바위에 튄 물방울이 마음심(心)을 새겼다고 한다. 지금은 세월의 흔적탓인지 글자를 또렷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처마끝에는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늦가을 정취를 더하고 있다. 툇마루에는 '일묵여뢰(一默如雷)'란 편액이 걸려 있다. 유마경에 나오는 '침묵이 곧 우레와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암자를 지키는 스님을 찾지는 않았다.툇마루에 앉았다. 사불바위가 안개에 휩싸인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비라도 올라치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는 신비로움까지 더해준다. 묘적암을 나서는길. 나옹선사의 한시가 머릿속을 맴돈다. 靑山兮要 我以無語(청산은 날더러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兮要 我以無垢(창공은 날더러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 無憎兮(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 而終我(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라 하네).

문경새재가는길

묘적암을 나와 '문경새재 옛길'로 방향을 잡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문경새재 옛길'은 문경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을 걸어보는길이다. 문경새재는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고개다. 백두대간(白頭大幹) 마루를 넘는 새재는 조선시대 영남과 기호 지방을 잇는 영남대로(嶺南大路)상의 중심지였다. 사회, 경제, 문화 등 문물의 교류지이자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라는 말에는 새(島)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草)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우릿재 사이(間)의 고개, 새(新)로 만든 고개 라는 뜻이 담겨있다.새재가 조선시대 태종 때 뚫렸으니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600년 전이다.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며 한양 과거길을 오르내리던 선비들의 청운의 꿈, 그리고 민초들의 삶과 땀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 앞에 서서 백두대간 마루를 넘나드는 하늘을 쳐다본다. 먹구름을 잔뜩 머금은 하늘은 금세라도 비를 뿌릴태세다. 그것도 잠시 그 옛날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길에 나선 선비의 앞날에 희망을 던져주듯 하늘이 열리며 빛내림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문경새재 주흘관

새재 1관을 지나 2km정도 가면 교귀정이 나온다. 경상감사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곳에 세워진 정자다. 조선시대 신임감사의 인수인계는 도 경계 지점에서 이뤄져 이 지점을 교귀라 했다.교귀정을 지나 2관문과 3관문인 조곡관과 조령관까지 거닐어 본다. 완만한 경사의 6.5km 길은 사람을 편하게 한다. 문경=글ㆍ사진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여행메모▲가는길=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점촌ㆍ함창나들목으로 나온다. 59번 국도로 가다 923번 국도로 갈아타면 산북면~대하리삼거리~김용삼거리를 지나면 대승사로 이어진다.
▲먹거리=약돌돼지고기가 유명하다. 약돌(거정석)을 사료에 섞어 먹인 돼지에 고추장 양념을 발라 연탄불에 구웠다. 비계는 쫀득쫀득하고 살코기는 야들야들하다. 새재도립공원 앞 새재초곡관(054-571-2320), '새재할매집(054-571-5600), 탄광촌(054-572-0154) 등이 잘한다고 소문났다. 중앙동에 있는 솔밭식당(054-555-4676)의 골뱅이국은 해장을 겸한 아침식사로 좋다. ▲즐길거리=철로자전거가 유명하다. 진남역(054-553-8300), 불정역, 가은역에서 출발하며 4인 가족용 철로자전거 1대에 1만5천원, 1만원(불정역)이다. 탄산수와 알카리수를 동시에 체험 할 수 있는 문경종합온천(054-571-2002)에서 온천욕도 좋다. 문경온천 인근에 사계절 썰매장을 비롯해 문경석탄박물관, 관광사격장, 활공랜드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다.<ⓒ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사진부 조용준 기자 jun21@ⓒ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