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홀로 씁쓸히 시를 읊는다(秋風唯苦吟)/세상의 길에 내 말 알아듣는 이 없네(世路少知音)/창밖에 새벽비(窓外三更雨)/등불앞 마음 1만리(燈前萬里心)
최치원(崔致遠)의 '가을밤 비는 내리는데(秋夜雨中)'■ 오래전 이 시를 읽을 때, '씁쓸히 시를 읊는' 이가 최치원 자신인줄로만 알았다. 가만히 보니, 가을바람이 읊는 것이다. 이게 묘미다. 이걸 읽어내야 세상의 길에 내 말 알아듣는 이가 없다는 것이 최치원의 직설적 탄식이 아님을 눈치 챈다. 그가 섣불리 푸념을 내뱉을 리 없다. 가을바람이 말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바로 빗줄기를 거문고 현(絃)처럼 연주하며 바람이 최치원에게 가만히 속삭인다. 이 빗소리에 깃든 음악을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지음(知音)은 백아가 종자기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가락에 부친 악상(樂想)을 정확하게 알아차렸다는 중국 옛이야기를 빌렸다. 그런데 이 새벽에 내 귀가 그 비바람의 음악을 듣고 있다. 1만리 저쪽에서 불어와 한 가닥 빗줄기를 건드리며 내는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을. 이 아름다운 찰나, 결정적 순간. 이 시는 바람의 노래를 제대로 알아들은 위대한 귀의 고백이다. 1만리 무대에서 펼쳐지는 바람오케스트라를 감상하는 위대한 지성의 귀를 부러워하라.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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