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의 X-파일]아오키, 일본 톱에서 제2의 개척자로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5월 19일 밀러파크. 밀워키 브루어스는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인터리그전에서 1회 선두타자 대너드 스판에게 2루타를 내주며 선제실점의 위기를 맞았다. 후속 브라이언 도지어는 밀워키 투수 마르코 에스트라다의 2구째 시속 147km 직구를 끌어당겼다. 타구는 가운데 담장으로 뻗어나가며 안타로 연결되는 듯했다. 우중간에 치우쳐 있던 중견수 아오키 노리치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40m가량을 전력으로 내달렸고, 머리위로 넘어가는 타구를 가까스로 잡아냈다. 경기중계를 맡았던 ‘FSN(Fox Sports Network) 위스콘신’의 캐스터는 감탄했다.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나온 윌리 메이스(뉴욕 자이언츠)의 ‘더 캐치(The Catch)’를 연상시키는 수비였습니다.” 이날 아오키의 활약은 수비에 머물지 않았다. 2번 타자로 나선 4타석에서 4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시즌 타율을 3할로 끌어올렸다. 팀은 3-11로 졌지만 클럽하우스를 찾은 론 로닉 감독은 아오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자들은 경쟁 상대인 나이저 모건, 카를로스 고메즈 등을 언급하며 아오키의 향후 기용방침을 물었다. 로닉 감독은 망설이지 않았다.“모건은 타율 1할8푼9리를 기록 중인 왼손타자다. 기회는 아오키에게 더 많이 갈 수밖에 없다. 곧 고메즈가 부상에서 복귀하지만 아오키는 전날 휴스턴 에스트로스전에서 왼손투수 J.A 햅을 상대로 3안타를 쳤다. 앞으로 왼손투수가 선발로 나오더라도 아오키를 가장 먼저 고려하겠다.”불과 나흘 전 뉴욕 메츠전이 열린 시티필드에서 로닉 감독은 “모건, 아오키, 고메즈 중 붙박이 중견수는 없다. 좋은 성적을 거두는 선수를 우선적으로 기용할 것”이라 답했다. 입장은 180도 달라졌다. 도지어의 타구를 잡아내며 아오키는 로닉 감독의 마음도 함께 사로잡았다.일본인선수 거품 붕괴에서 비롯된 시련아오키는 일본리그 최고의 타자였다.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 동안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뛰며 세 차례(2005년, 2007년, 2010년)나 센트럴리그 타율 1위에 올랐다. 통산 타율도 3할2푼9리(3900타수1284안타)에 이른다. 아오키는 지난해 11월 18일 포스팅을 통한 메이저리그 입성을 선언했다. 12월 17일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한 구단을 발표했다. 밀워키였다. 그런데 액수는 250만 달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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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밀워키 구단은 “우리에겐 아시아담당 스카우트가 없다. 기량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포스팅 협상마감일인 1월 17일 전까지 애리조나에 위치한 밀워키 스프링캠프지에서 입단테스를 받아야 할 것”이라 밝혔다. 아오키는 군말 없이 1월 5일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3일 뒤 덕 멜빈 단장, 로닉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단테스를 소화했다. 이튿날에는 메디컬 테스트도 받았다. 멜빈 단장은 “(기량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곧 입단여부를 결정할 것”이라 했다. 1월 17일 밀워키는 2년간 250만 달러를 주는 조건에 입단을 매듭지었다.아오키는 1월 20일 야쿠르트 구단 사무실에서 입단 기자회견을 가졌다. “겨우 출발선상에 선 느낌이다. (테스트를 받는) 미국에서의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팀에 보탬이 될지 고민하고 있다.” 일본 기자들은 굴욕적인 입단테스트와 낮은 연봉 등을 지적했다. 2년 뒤 FA 자격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물었다. 아오키는 긍정적이었다. “8년 전 야쿠르트에 입단할 때 4순위로 지명됐다. 큰 기대 없이 야구를 시작하는 것에 익숙하다.”초라한 시작, 그러나...아오키는 휴식 없이 이튿날 미국으로 떠났다. 착실한 준비를 위해서였다. 노력은 시범경기에서 결실로 이어졌다. 27경기에서 타율 2할9푼9리 1홈런 OPS(장타율+출루율) 0.801을 기록, 개막전 25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밀워키 구단 수뇌부, 팀 동료, 담당 기자 등으로부터 성실한 선수라는 호평도 얻었다. 스프링캠프 기간 가장 먼저 구장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퇴근한 까닭이었다.사실 밀워키가 아오키를 데려온 가장 큰 이유는 공백 메우기였다. 주전 좌익수이자 타선의 핵인 라이언 브론이다. 금지약물 양성반응으로 50경기 출장정지를 받았다. 브론 측은 소변샘플 운송과정에서의 문제를 근거로 이의를 제기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이를 받아들여 중징계를 취소했다. 아오키가 자리를 보장받을 수 없던 건 당연지사. 다른 외야 자리도 사정은 비슷했다. 우익수는 지난 시즌 타율 2할8푼5리 26홈런 OPS 0.866 등을 남긴 코리 하트의 몫이었다. 중견수는 지난 시즌 119경기에서 타율 3할4리를 기록한 모건과 고메즈의 플래툰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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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는 초반 대타 겸 외야 대수비 요원으로 경기에 출전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일본리그에서의 8년 경험은 그를 절망에 가둬두지 않았다. 4월 한 달 나선 18경기, 26차례 타석에서 타율 3할4리(23타수 7안타)를 남기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5월 아오키에게는 기회가 주어졌다. 모건의 부진과 고메즈의 부상, 하트의 1루 수비 출전으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로닉 감독은 팀에서 유일하게 외야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는 그를 신뢰했다.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스퀴즈번트와 진루타, 영리한 베이스러닝 등도 함께 주목했다. ‘제2의 이치로’ 탄생아오키는 일본리그 시절부터 비디오 분석을 통해 타격 폼을 체크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즌 중에도 자세를 변경해 성과를 만들었다. 슬럼프가 장기화되면 사진기자에게 자신의 스윙 연속 동작을 찍어 보내줄 것을 요구하거나 중계방송 PD에게 슈퍼슬로우 카메라로 찍은 화면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프로 데뷔 첫해인 2004년으로 돌아가 보자. 아오키는 2군 이스턴리그에서 3할7푼2리로 타율 1위를 차지했다. 이듬해 그는 이나바 아츠노리(니혼햄 파이터스)의 이적으로 공석이 된 중견수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202안타를 치며 타율 3할4푼4리를 기록, 센트럴리그 수위타자가 됐다. 1994년 스즈키 이치로가 210안타를 때려낸 이후 한 시즌 200안타를 친 두 번째 주인공의 탄생이었다.아오키는 전형적인 리니어 히터(Linear Hitter)다. 양발을 어깨넓이 정도로 벌리고 스트라이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앞발(오른발)을 길게 뻗으면서 직선으로 체중을 이동시키며 스윙한다. 그는 장점인 빠른 스윙과 빼어난 손목 활용, 맞추는 능력 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데뷔 때부터 히팅 포인트를 앞에 뒀다. 그래서 신인 타자들이 약점을 노출하기 마련인 변화구를 떨어지기 전에 공략할 수 있었다.직구 대처 또한 탁월했다. 히팅 포인트를 앞에 뒀지만 배트는 밀리지 않았다. 어떤 코스의 공에도 공과 배트가 수평방향에서 만나는 레벨스윙을 구사해 다양한 안타를 만들었다. 공과 배트가 만나는 면적이 넓은 레벨 스윙으로 타구는 막혀도 2루수와 중견수, 우익수 사이 혹은 유격수와 3루수, 좌익수, 중견수 사이에 떨어지는 텍사스 히트로 이어졌다.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 레드삭스)의 공을 기다리는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의 스즈키 이치로[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일본 매체들은 ‘제2의 이치로’라며 타격에 일제히 찬사를 보냈다. 아오키는 만족하지 않았다. 고민이 있었다. 안타행진이 계속되자 투수들은 그가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에도 공격적이라는 점을 역이용했다. 직구, 변화구를 모두 존에서 많이 벗어나는 유인구로 던졌다.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둬 생긴 약점 해결도 숙제였다. 아오키는 공을 배트 중심에 맞혀도 좀처럼 장타를 터뜨리지 못했다. 체중을 제대로 싣지 못한 탓이었다. 아오키가 그해 때린 장타는 33개(2루타 26개, 3루타 4개, 홈런 3개). 삼진은 113차례나 당했다. 반면 볼넷은 37개였다. 이듬해인 2006년 아오키는 스윙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타석에서 조금 더 인내를 발휘, 유인구를 골라냈다. 그 덕에 볼넷은 70개로 늘어났다. 192안타로 타율은 3할2푼1리였다. 출루 때마다 그는 빠른 발로 상대 내야진을 뒤흔들었다. 41차례 베이스를 훔치며 도루 타이틀을 챙겼다. 무결점 타자로 진화하다아오키는 이어진 오프 시즌 타격 교정에 나섰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30홈런을 치는 톱타자. 그런데 손을 댄 타격 폼은 다소 의아했다. 준비 과정에서 전보다 몸을 더 웅크려 스트라이크존을 좁혔다. 테이크 백(Take Back) 동작에서 백스윙도 줄였다. 배트는 한 뼘 가까이 짧게 잡았다. 변화는 하나 더 있었다. 스트라이드에서 보폭을 줄이고 엉덩이 회전(Hip Turn) 속도를 높여 몸을 팽이가 돌듯 강하게 회전시켰다. 로테이셔널 히팅(Rotaional Hitting)이었다.아오키가 당시 배리 본즈를 롤 모델로 삼았다. 본즈는 2001년 73홈런을 때렸다. 이후 많은 투수들은 그를 상대할 때 볼넷으로 거르거나 몸에 맞는 공을 허용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몸 쪽 승부를 고집했다.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공이 몸 쪽 공으로 치우치자 본즈는 대응을 위해 테이크 백이 거의 없는 타격 자세를 취했다. 스윙에서는 빠른 몸통 회전으로 자신의 매서운 배트 스피드를 극대화시켰다. 그는 배트도 짧게 잡았다. 스윙 직전까지 공을 최대한 지켜보다 최단거리에서 임팩트를 가져가지 위한 전략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스트라이크존에서 터무니없이 벗어나는 공에 나가는 스윙을 막으려는 의도도 함께 담겨 있었다. 본즈는 당시 많은 볼넷을 얻으며 장타를 만드는 비법에 대해 “배트를 짧게 잡으면 스트라이크존에서 크게 벗어나는 공을 맞출 수 없다. 나만의 스트라이크존이 그만큼 좁아진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아오키는 이 말에 주목했다. 그는 한 TV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본즈와의 공통점을 묻는 질문에 “동체 시력과 배트 스피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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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언이 아니었다. 아오키는 2007년 193안타를 때리며 80개의 볼넷을 골랐다. 타율은 데뷔 이후 가장 높은 3할4푼6리. 출루율 역시 0.434로 가장 좋았다. 목표로 내걸었던 30홈런은 이루지 못했지만 20개나 쳤다. 그 덕에 장타율은 5할대(0.508)로 올라섰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적은 삼진 수.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양산해내는 고유 타격 스타일 고수에도 2년 전 113개의 절반 수준인 66개로 줄였다. 이후 2009년을 제외한 4년 동안 아오키는 엘리트 타자의 상징인 3할 타율, 4할 출루율, 5할 장타율을 계속 찍었다. 약이 된 커리어 로우2011시즌을 앞둔 일본리그 타자들은 침울했다. 일본야구기구(NPB)가 ‘날지 않는 공’으로 불리는 신공인구를 도입했다. 그해 안타 수는 전년보다 11.8% 감소했다. 득점과 홈런도 각각 25.3%와 41.5% 떨어졌다. ‘문화적 충격’ 수준의 투고타저 시대 개막이었다. 사실 공격력 저하는 공인구의 반발력 차이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 도호쿠 대지진으로 일본은 한동안 전력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시즌 강행을 선언한 NPB는 낮 경기로만 리그를 진행할 수 없었다. 야간경기 소화를 위해 경기시간 단축은 필수불가결. NPB는 스트라이크존 확대를 최적의 묘책으로 여겼다. “스트라이크존 확대는 없다”라고 공식 발표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관계자는 거의 없다. 공인구 변경과 스트라이크존 확대는 정확성과 장타력을 모두 겸비한 타자들의 부진을 불러일으켰다. 아오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시즌 성적은 타율 2할9푼2리 170안타 OPS 0.718. 데뷔 시즌인 2004년(10경기 출전, 타율 2할)을 제외하고 프로에서 거둔 최악의 기록이었다. 일본 관계자들은 3할 아래로 떨어진 타율과 0.360에 머문 장타율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요미우리 자이언츠), 와다 가즈히로(주니치 드래곤즈), 알렉스 라미레즈(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맷 머튼(한신 타이거즈) 등도 약속이라도 한 듯 제각각 커리어 로우를 남겼다.바뀐 환경은 아오키에게 더욱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는 이전까지 자신만의 스트라이크존을 설정하고 볼넷을 골랐다. 또 안타를 위해 타격을 하다 실투나 입맛에 맞는 공이 들어올 때 장타로 연결하는 라인드라이브 히터에 가까웠다. 갑작스레 넓어진 스트라이크존은 수년간 구축해온 노하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흐트러진 선구안은 그대로 타율, 장타율의 동반 하락으로 이어졌다.아오키는 초반 닥친 어려움을 약으로 여겼다. 시즌을 치르며 그는 목표를 한 가지로 좁혔다. 3할 이상의 타율이었다. 아오키는 스트라이드에서 내딛는 보폭을 줄였다. 몸통의 회전 속도를 올렸고 타격에서 왼팔을 최대한 겨드랑이에 밀착해 콤팩트한 스윙을 하는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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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이루는데 실패했지만 아오키는 근접한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선택과 집중’은 일본리그보다 더 빠른 직구와 날카로운 변화구를 구사하는 투수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를 공략하는 데 초석이 됐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이 같은 변화를 강행한 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12년 전인 2000년 오릭스 블루웨이브 소속이던 이치로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 특유 시계추 타법을 버렸다. 다리를 땅에 고정시키고 좁은 보폭에서 오른발을 열어놓고 오로지 공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 변화는 또 다른 성공으로 가는 열쇠가 됐다. 그해 그는 시즌 최고인 3할8푼7리의 타율을 남겼다. 일본리그 9년 통산 장타율이 0.522였지만 이치로는 ‘선택과 집중’ 덕에 결국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직구와 몸 쪽 공에 대한 적응력아오키는 29일까지 117경기에 출전, 타율 2할7푼9리 107안타 OPS 0.748를 기록했다. 비교적 순조로운 첫 발이다. 보통 일본인 타자들은 메이저리그에서 두 가지 어려움에 부딪힌다. 더 빠르고 움직임이 좋은 직구(투심, 커터, 싱커 등 변종직구 포함)와 집요한 몸 쪽 승부다. 메이저리그 도전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쓰이 히데키를 살펴보면 이는 잘 알 수 있다. 2003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마쓰이는 초반 빠른 직구와 과감한 몸 쪽 승부에 적잖게 고전했다. 특히 바깥쪽 공에 땅볼아웃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바깥쪽 공에 약점을 보인 건 아니었다. 몸 쪽 공에 대한 공포로 일본리그 때보다 타석에서 한 발짝 떨어져 타격을 하다가 나온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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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이 거듭되자 그해 6월 조 토레 당시 뉴욕 양키즈 감독은 “홈 플레이트 방향으로 좀 더 붙어서 타격을 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마쓰이는 이후 홈 플레이트 방향으로 15cm 정도 붙어 타격을 소화했다. 안타 수를 늘기 시작했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로부터 “거포라는 말을 듣고 데려왔는데 똑딱이였다”라는 독설을 들었지만 마쓰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묵묵히 직구, 몸 쪽 공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시즌 뒤 구단이 기대한 홈런은 16개로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마쓰이는 타율 2할8푼7리 179안타 106타점을 기록, 타선의 중심으로 거듭났다. 점점 높아진 적응력에 이듬해 홈런은 31개로 늘었다.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뒤늦게 흡족함을 표시했다.아오키의 롱런 가능성은?아오키는 올 시즌 왼손투수에게 고전한다. 오른손투수 상대 성적은 타율 2할9푼7리, OPS 0.794. 왼손투수에게는 타율 2할4푼8리 OPS 0.662다. 직구 대처에 문제는 없다. 아오키는 왼손투수 직구를 56차례 공략, 19개의 안타를 만들었다. 타율로 따지면 3할3푼9리. 비교적 높은 수치는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직구(45번)를 공략했기에 가능했다. 존을 통과하는 몸 쪽 직구 상대 타율은 무려 6할1푼1리(18타수 11안타). 반면 존을 벗어나는 몸 쪽 직구에 배트는 1번(무안타)밖에 나가지 않았다. 존을 벗어난 바깥쪽 직구에는 특유 밀어치기로 대응, 타율 4할2푼9리(7타수 3안타)를 남겼다. 결국 아오키의 타율이 3할 밑으로 내려간 원인은 직구와 몸 쪽 공에 대한 적응 실패가 아니다. 변화구에 대한 적응력이 직구만큼 따라주지 못해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메이저리그에서도 특유 선구안과 컨택 능력을 선보이고 배트 스피드 역시 크게 밀리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오키의 성적이 급격히 추락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는 야쿠르트 시절처럼 1번과 3번 타순을 오고가지도 않는다. 매 타석 장타를 생성해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여야하는 부담도 사라졌다. 문제는 체력이다. 아오키는 후반기 들어 타율 2할4푼7리 OPS 0.643으로 부진하다. 1995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노모 히데오 취재를 시작으로 18년째 메이저리그를 취재 중인 프리랜서 기자 기구치 요시다카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일주일에 하루 휴식이 보장되는 일본리그와 달리 메이저리그는 최대 20연전이 넘어가는 강행군을 벌인다. 일본과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이동거리, 무엇보다 같은 미국 땅인데도 3시간이나 생기는 시차는 더 많은 피로를 불러일으킨다. 매일 경기에 출장하며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나 성적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 관리, 타격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스스로 이겨내는 방법 등은 이미 일본리그 8년의 경험을 통해 배웠을 것이다. 결국 아오키의 메이저리그 성공의 열쇠는 야구가 아닌 체력관리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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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톰 버두치 기자는 ‘일본인 선수들에 대한 달라진 시선’이라는 특집기사에서 관계자 멘트를 인용해 이렇게 전했다. “메이저리그는 주로 일본인 외야수를 백업인 제4의 외야수로, 내야수를 유틸리티 요원 정도로 바라본다.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하던 일본리그 때와 입지는 같을 수 없다. 결국 관건은 팀 적응이다. 일본에서 뛰다가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선수들은 반드시 이를 유념해야 한다.”최근 후쿠도메 고스케(뉴욕 양키즈), 니시오카 츠요시(미네소타 트윈스) 등의 연이은 실패로 일본인 야수에 대한 메이저리그의 평가는 차가워졌다. 이치로나 마쓰이와 같은 성공 사례도 있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극히 예외적인 존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다. 어찌 보면 아오키의 상황은 혈혈단신으로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을 받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노모 히데오의 1994년 겨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입단테스트라는 굴욕에 낮은 연봉을 감수하고 메이저리그를 택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일본인 야수들에 대한 평가를 바꿔나가는 개척자(Pioneer)에 가까운 셈이다. 주위의 차가운 비웃음에도 미국행을 고집했던 노모의 회상은 그에게 힘이 될 수 있다. “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이종길 기자 leemea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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