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기자
김지선 상무 프로필 ▲1966년 출생 ▲1989년 한양대 공예과 졸업 ▲1992년 한양대 미술교육대학원 졸업 ▲1997 미국 뉴욕 프랫인스티튜트 졸업 ▲1997년 CJ제일제당 입사 ▲2007년 CJ제일제당 마케팅실 디자인센터장 ▲2010년 마케팅실 디자인센터장 겸 상무
[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리 천장'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여성 임원 1세대'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 1980년대 입사한 신입 공채들이 '별'을 달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풍(女風) 시대'의 개막이다.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드리엔 멘델은 <유능한 여자는 많은데 왜 성공한 여자는 없을까>라는 저서에서 직장 생활에는 여자가 모르는 불문율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멘델은 유능한 여성은 많은데 성공하는 여성이 적은 이유로 "여성이 목표지향적인 남성 사회의 룰을 모른 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관계지향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비즈니스라는 게임에서 이기려면 유능한 척, 강한 척하고 재미가 없어도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필요하면 싸우고, 팀의 일원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최근 사회분위기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채로 입사해 조직에서 '별'을 다는 여성임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임원 1세대라는 점에서 이들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말 그대로 유리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신호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한 조직에서 오랜 시간 몸담으며 남성과 당당히 경쟁해 살아남고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여성(女星)들. 유리 천장을 과감히 깨트린 여성 임원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은 어떠할까.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그녀들의 인생 스토리. 20~30대 새내기 여성 직장인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한민국 여성 임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전한다.<편집자주>“늙은 이미지 바꿔보자” 파격1년만에 ‘전통 강조’로 전환힘겨웠지만 “최고다” 칭찬에 보람관심분야 생기면 모조리 도전美유학때 전공 바꿔달라 떼쓰기도욕심 많고 포기도 빨랐던 ‘변덕쟁이’학창시절 이런 친구가 있었던 것 같다. 성급한 성격에 호기심도 많아 여기저기 참견 잘하는 친구. 맘에 드는 걸 발견하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밀어붙인다.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기 전까진 좀처럼 빠져나오길 싫어하고, 관심있는 것에 대해 얘기할때면 벌떡 일어나거나 손뼉을 치며 눈을 빛내는. 김지선 CJ제일제당 디자인센터장(상무)은 그렇게 친근한 성격과 첫인상을 가졌다. '같은반에서 항상 옆자리에 있던 친구가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까 대기업 임원이 돼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지나친 걸까. 발랄한 단발머리와 아방가르드한 배기팬츠를 입고 나타난 그는 어쩐지 어제까지 나와 학교 앞 분식집을 드나들던 '동지(?)'의 느낌이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갔다. 기자는 최신 유행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학용품은 반드시 사고야 마는 고집장이를 만날 수 있었다. 새로 생긴 분식집은 죄다 들러 맛을 보던 사춘기 여고생도 있었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교수에게 전공을 바꿔달라 떼쓰는 자아가 강한 유학생과도 마주했다. 김 상무는 마치 아는 누군가의 얘기를 전해주듯 줄곧 여유있는 표정이었지만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을 때마다 자세를 고쳐 잡았고, 목소리는 높낮이가 달라지거나 가늘게 떨렸다. CJ제일제당과 그룹의 디자인을 책임지는 수장 답게, 자신의 인생얘기를 디자인하는 솜씨도 뛰어났다. ◆난 툭하면 짐 싸던 극성맞은 유학생 = "제가 생각해도 참 극성맞았어요." 오랫동안 미술을 공부했던 김 상무는 본인 스스로의 학창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실제 그의 20대 시절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변덕이 참 죽 끓듯 했다. 관심있는 것은 모조리 도전했고, 아니라고 판단되면 포기도 빨랐다. 학부 때 미대에서 공예를 전공한 그는 미술교육대학원에 진학하며 남들보다 긴 공부를 택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당장 취업이 하기 싫어서였다. 가장 관심 많은 것은 외국문화였다. 80년대 중후반이었던 당시는 외국 화장품이나 옷을 국내서 보기 힘들었다. 잡지책 '보그'를 옆에 끼고 살았다. 대학원까지 마쳤지만 막상 '되고 싶은' 것은 없었고, '배우고 싶은' 것만 자꾸 쌓였다. 그래서 연고도 없는 미국에 몸을 내던졌다. 공간 인테리어에 관심이 생기던 터라 인테리어를 전공으로 골랐다. 그러나 오랜 고민 없이 한 그 선택은 나중에 보니 잘못된 것이었다. "규모 있게 미적감각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테리어는 계산적이고 수치를 중시하는 영역이었습니다. 설계하고 도면을 만드는 작업은 제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달랐어요. 결국 한 학기를 힘들게 마쳤지만, 학점을 받는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때부터 김 상무의 '1인 시위'가 시작됐다. 교수와 학과장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쫓아다니며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으로 전과를 시켜달라고 졸랐다. 당시 랭귀지 스쿨을 병행하며 언어를 익힐때라 제대로 된 의사표현도 하지 못했다. "왜 전과를 하겠다는거냐"는 말에 밤새워 교수에게 대답할 이유를 영작해 달달 외우기를 반복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놨다. 당시 미국은 경기가 좋지 않아 유학생이 빠져나가는 것에 민감했다. 교수는 마지막 변심이 될거라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전공을 바꾸는 데 동의해주었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은 그 안에있는 '패키지 디자인'을 공부해보고 싶어 선택한 전공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생활 자체가 너무 지겨웠다. 더이상 바꿀 여지가 없는 전공은 배울수록 어려웠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도 크게 느껴졌다. 마침 여름방학을 맞은 김 상무는 머물던 집의 짐을 모조리 싸 무작정 한국으로 부쳤다. 다른 삶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겁없는 포기였다. 다행히 방황은 길지 않았다. 김 상무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아주 약간 철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 달은 아무 생각없이 쉬고 놀고 했죠. 당시 나이 20대 후반이었어요. 새로 뭘 시작할건지를 고민하다가 문득, 내가 갖고 있는 인프라가 뭔지를 생각해봤어요. 인테리어도, 패키징도, 완성된 게 없다는 걸 깨달았죠.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거쟎아요. 그리고 지금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정하지 않으면 정말 후회하겠다는 자기반성이 시작됐고, 바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서른이 다 돼서도 이어졌던 '질풍노도의 시기'는 딱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