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공정거래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은행 약관 심사 결과는 은행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서 위조 등의 사고로 인한 손해는 고객이 부담한다'거나 '컴퓨터의 고장이나 장애로 인한 서비스 지연에 대해 은행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식의 불공정 약관이 다수 발견됐다. 손해와 책임은 고객에게 다 떠넘기고 은행은 이익과 권리만 누리겠다는 것이다. 팩스를 이용한 거래의 경우 한 은행은 '팩스 거래지시서와 관련된 손실에 대해 은행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완전한 면책 조항을 약관에 넣었다. 외환거래에서도 '결제에 관한 고객의 지시를 실행하거나 거절한 것과 관련된 모든 손해ㆍ소송ㆍ비용에 대해 고객이 책임지고 은행에는 손해가 없도록 한다'는 완전한 면책 조항이 들어 있다. 자동이체의 경우 '은행에 고의나 과실이 없는 경우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고객의 권리에 대한 과도한 제한으로 지적됐다. 은행의 고객이 깨알 같은 글자로 빽빽하게 적힌 약관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번 제대로 읽어보는 것만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은행 약관에는 은행에서만 사용되는 생소한 용어가 많아 은행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 한 고객 혼자서는 여러 번 읽어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적지 않다. 이런 원천적 정보 비대칭 관계 속에서 은행이 불공정 약관을 근거로 고객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나마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의뢰로 공정위가 은행 약관을 심사해 문제가 있는 조항들을 시정하도록 조치했다니 다행이다. 해당 은행들은 신규 고객에게만이 아니라 기존 고객에 대해서도 불공정 약관을 시정하는 데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정위가 이번에 심사한 은행 약관은 은행들이 이용하는 전체 약관 중 일부인 461개이며, 그 중 11개 유형 36개 조항에 대해 시정을 요구했을 뿐이다. 불공정 약관 추방을 위한 금융당국과 공정위의 감독과 감시 활동은 더 확대돼야 한다. 은행 약관 중 이번에 들여다보지 못한 것들은 물론이고 신용카드회사, 증권회사, 저축은행, 보험회사 등 다른 금융업종 업체들의 약관도 철저히 모니터해야 한다. 고객을 볼모로 한 불공정 약관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서는 금융이 신뢰를 받을 수 없다.<ⓒ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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