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은회색의 머리만큼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첫눈에 중견 여배우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배우 데뷔작인 민중극단의 '꿀맛'이 1975년 작이니 벌써 37년 차다. 영화 '봄, 눈'(감독 김태균, 26일 개봉) 홍보로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란다며 아이처럼 찡그리기도 했지만, 인터뷰에 들어가자 이내 노련한 '대' 배우로 변신했다. 연기 신념을 이야기할 때는 사뭇 진지했지만 사적인 얘기가 나오면 소탈하게 웃었다. '나도 파자마 바람에 코트 하나 달랑 걸치고 아이 학교 데려다 주는 엄마'라며 웃는 배우 윤석화(56)를 만났다.'레테의 연가' 이후 25년만의 영화 복귀작 '봄, 눈'에서 윤석화는 평범한 엄마 '순옥'을 그려냈다. 화려함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되레 파리하게 늙고 몹쓸 병에 걸린 중년 여자일 뿐이다. 남편은 '여자가 궁상맞다'며 구박하고 딸은 '엄마가 뭘 해줬냐'며 짜증낸다. 순옥은 뒤에선 울지만 앞에선 묵묵히 받아주는 엄마다.
윤석화의 대표작으로는 단연 '신의 아그네스'가 첫손에 꼽힌다. 1983년 국내 초연된 이 작품에서 윤석화는 잊지 못할 아그네스로 분했다. 당시로는 드물게 100회가 넘는 장기공연기록을 세워 화제를 뿌린 '신의 아그네스'를 통해 윤석화는 연극계의 '불멸'의 스타로 입지를 다졌으며, 이후 '마리아 칼라스' '위트' 등의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선 굵고 개성 강한 연기세계를 보여줬다. 그랬던 그가 스크린에선 보통의 엄마로 돌아오다니, 조금 의외 아니냐는 질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연기 할 때는 저라는 악기가 새로운 세상과 삶을 연주하는 것뿐이지 그게 제 본 모습은 아니에요. 저도 보통 사람이거든요. 대중이 기대하는 세고 강하고 화려한 모습이 본래의 저라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더 보편적인 연기로 다가가려고 했습니다."반응이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불치병에 걸려 가족과 이별을 준비하는 엄마'라는 설정이 진부하다는 얘기가 많았던 것이다. 연극 '친정엄마'나 영화 '애자'는 물론 일년 365일 내내 TV 드라마만 켜면 나오는 닳아빠진 레퍼토리다. 이를 윤석화가 몰랐을 리 없다.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그거에요. 그렇지만 저는 '어미'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고 우리 모두에게 공감을 주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미들에게 '당신만 힘든 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힘들게 살고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남긴 흔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네요' 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엄마 이야기가 갖는 선한 영향력을 믿었던 탓에 자신 있게 영화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는 윤석화. 그렇지만 오랜 세월 연극배우로 살아온 탓에 영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단호했다. "전혀요. 집중력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연극은 철저히 고립된 섬인데 데 반해 영화는 공간의 변화가 많잖아요. 배우 연기가 좋아도 주변조건 때문에 NG가 나요. NG가 나면 처음 감정이 닳아 집중하는데 어렵지만, 집중만 잘 한다면 영화 연기와 연극 연기는 기본적으로 똑같아요.(웃음)"'봄, 눈'의 개봉을 지켜보자마자 윤석화는 영국 런던으로 향해야 한다.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웨스트엔드 뮤지컬 '톱 햇 Top Hat'이 27일 런던에서 역사적인 오프닝 행사를 갖기 때문이다. 2년 전부터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웨스트엔드에서 프로듀서로 일한 윤석화의 '맨땅에 헤딩' 정신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92년 국내 초연한 연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로는 프로듀서가 아닌 배우로 웨스트엔드 무대에 서고 싶은 바람도 있다. 윤석화의 도전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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