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채정선 기자]종이접기 방식으로 만든 이세이 미야케의 '132.5'와 경복궁에서의 프라다 트랜스포머, 최근 이탈리아 건축가 지오 폰티(Gio Ponti)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펜디 봄·여름 컬렉션까지. 패션과 건축, 건축과 패션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 국내 패션 큐레이터 1호, 김홍기 패션평론가가 건축과 패션을 살핀 글을 보내왔다.
▲ 프라다와 렘 콜하스와의 협업, 2009년 경복궁에 설치된 회전형 건축물 프라다 트랜스포머
옷과 건축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공간의 창조’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차드 세넷은 1974년 작 ‘공적 인간의 몰락’에서 “외양은 내면을 감춘 인간을 감싸는 은폐물이다. 옷은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 사이에 놓인 완충지대다”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옷을 통하여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공간, 즉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오간다. 패션은 인체라는 3차원의 조형 위에 집을 짓는 반면 건축은 개인과 조직, 나아가 사회전체가 공유하는 공간을 창조한다.직물(Fabric)이란 한 벌의 옷을 만드는 소재로 되지만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보면 건축물의 얼개, 구조란 뜻도 있다. 건축에서 건물의 주 출입구를 포함한 정면의 벽면 전체를 뜻하는 파사드(Facade)는 신체에 비유하면 인간의 얼굴에 해당한다. 이 파사드는 심리학에서는 ‘개인의 내면적 감정을 감춘 겉치레, 태도’를 뜻하기도 한다. 마치 옷의 표면처럼 건물의 외부는 그 안의 공간을 점유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감정과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패션에서 공간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이상적 신체미의 표현을 위해 패션은 다양한 공간을 창조해왔다. 시대별로 여성의 아름다움이 응축되는 신체 부위가 달랐기에 복식은 각 부위들을 확대, 축소, 은폐, 노출시키기 위한 공간을 생성해왔다. 이집트 시대에는 부피감이 있는 삼각형의 에이프런을 남녀 모두 착용했고 이는 피라미드의 형태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리스 시대의 대표적인 의상인 도리아 키톤은 절제된 균형미와 수직선을 강조하던 도리아 건축양식에서 온 것이다. 중세 고딕 시대에는 전반적으로 뾰족한 실루엣의 의상이 유행했는데 당시의 모자, 에냉(Hennin, 두 개의 원뿔 모양 모자로서 위에서 얇은 베일을 늘어뜨렸다)은 날카로운 고딕 첨탑에서 아이디어를 빌렸다. 이후 가슴과 허리를 미화시키기 위해 하체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15세기부터 코르셋과 고래 뼈로 만든 파딩게일(Farthingale, 스커트를 부풀리기 위한 허리받이 형식의 속치마)과 같은 스커트 보형물을 사용했다.
▲ 에냉을 쓴 여인의 초상과 파딩게일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면 식민지 개척과 더불어 왕궁에 누적되는 식민지 산물이 포개어진 모습에서 인간은 ‘주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옷 주름은 당대를 주름답던 유럽패권주의가 확장시킨 공간의 은유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바로크 건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무한 반복된 패턴과 건축 장식은 그대로 옷에 투영되었다. 거대한 외형을 빚어내는 실루엣과 꿈틀거리는 파도형태의 꽃 장식과 소용돌이 장식이 특징이었는데 이것은 식민지 개척을 위한 항해시대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근대의 여인들의 패션은 유기적인 S자 형태의 실루엣으로 변화되었고 이는 아르누보건축의 유선형 곡선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대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는 일본의 전통 종이접기 기술(오리가미)을 이용해 옷을 디자인했다. 오리가미 방식을 빌리면 칼과 가위로 종이를 자르지 않고도 접기를 통해서만 형상을 재현해낼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한 장의 천 조각 끄트머리를 잡고 올리면 한 벌의 의상이 나오도록 디자인했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작품에 ‘132.5’라는 작품제목을 붙인다. 한 장의 천(1)이 입체적 형상(3차원)이 되고 다시금 평면(2차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여기서 마지막 숫자 ‘5’는 한 장의 천이 한 벌의 의상으로서 누군가의 신체를 감싸는 오브제가 되었을 때,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5차원)가 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세이 미야케의 작업은 건축가들에게도 상호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의 건축의 스킨(피부)는 패션의 논리를 닮아간다. 최근 현대 건축은 겹쳐 입거나 접어 입는 패션의 레이어드 룩에서 영감을 받아 건물의 외피에 적용하기도 한다.
▲ 이세이 미야케의 종이접기 형식을 차용한 디자인 132.5
▶ 패션 속 건축, 서로를 열망하다데보라 퍼쉬(Deborah Fausch)는 ‘패션과 건축(Architecture in Fashion)’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변화의 속도와 기술, 리듬, 점유하는 공간의 속성이란 관점에서 패션과 건축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언급한다. 패션이 빠른 주기로 변화하는 시스템의 산물인 반면 건축은 정지되어 있거나 느리다. 기술과 소재 면에서도 패션은 유연하고 건축은 견고하다. 인간의 눈에 비치는 시각적 율동감을 뜻하는 리듬의 관점에서 보면 패션은 섬세하고 건축은 엄격하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측면을 보면 한 벌의 옷은 인간의 몸을 계절에 맞춰 구현하는데 목표를 두지만 건축은 영구적으로 한 지점을 점유한다. 그럼에도 의복과 건축 모두 어떠한 ‘구조’에 입혀진다는 유사점을 갖는다. 패션과 건축은 최근 상대의 조형언어를 도입해서 서로의 작업에 이용할 정도로 두 영역 간의 경계는 매우 모호해졌다. 패션 디자이너 지안 프랑코 페레는 ‘인간의 신체보다 아름다운 건축은 없다’고 천명할 만큼 건축은 도시공간을 감싸는 한 벌의 옷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건축은 패션 비즈니스의 강력한 도구로 진화한지 오래다. 창의적 건축가의 상상력을 통해 잉태된 쇼핑환경은 패션 하우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패션과 건축 사이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져가는 요즘, 온라인을 이용한 가상적 쇼핑환경의 창궐에 맞서 거대 패션 브랜드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현시적으로 드러내는 체험적 공간으로 매장을 구성해야 할 필요성과 부딪치게 된다.
▶ 구조가 회전해 3개 면이 각기 다른 공간을 구성했다. 그래서 이름도 '트랜스포머'.
프라다 만큼 건축을 통한 브랜드의 정체성 형성에 열정적인 브랜드는 없다. 건축가 렘 쿨하스와 헤르조그 & 드 뫼롱, 가즈요 세지마 등과 함께 1999년 에피센터라는 이름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시작으로 트랜스포머라는 도시 프로젝트도 완성했다. 프라다는 렘 콜하스의 건축화법인 거대한 공간감을 적용하여 패션 제국을 향한 의지와 열망을 표현했다. 패션에 개입하는 건축의 영향은 하우스 건축에서 멈추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패션은 건축양식에서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의 논리를 익혀왔다. ▶ 패션, 건축에서 건져낸 상상력의 흔적들이탈리아 출신의 건축의 거장 지오 폰티는 저서 ‘건축예찬’에서 “건축가는 돌과 나무와 유리라는 질료들을 상상력으로 버무리고 숙성시켜 건축이라는 교향곡을 만드는 예술가다. 건축은 재료들의 관현악적 편성인 것이다. 분수는 하나의 목소리며 계단은 소용돌이이며, 발코니는 한 척의 범선이며 문은 한 장의 초대장이다” 라고 주장한다. 패션디자이너도 이와 다르지 않다. 펜디의 2012 봄·여름 시즌 구두 컬렉션은 이 지오 폰티의 건축철학에 바치는 칼 라거펠트식의 오마주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그의 철학을 반영하듯 이번 컬렉션에 등장한 스트라이프 패턴의 뮬과 힐은 원뿔과 삼각형, 직사각형과 같은 지오메트릭 형상을 통해 만들어졌다. 발리의 올 봄·여름 컬렉션도 건축적인 조형미를 한껏 뽐낸다. 발목을 감싸는 원통 형태를 변주하여 힐 속에 또 다른 힐을 삽입하는 등 건축적인 구성주의 미학을 발산한다.
▲ 영화 '아이 엠 러브'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감독이 작업한 조르지오 아르마니 패션 필름 ‘원 플러스 원(One Plus One)’
이밖에도 2012년 아르마니 라인을 소개하는 필름에도 건축과의 조우가 돋보인다.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박물관(Museo Del Violino)에서 시작되는 영상은 한 여성의 아름다운 실루엣과 어우러진 감각적인 공간들, 그리고 그녀의 긴장감을 통해 그려지는 불안감과 서스펜스를 통해 영화 속 삼각관계를 그려낸다. 특히,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과 깔끔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빌딩, 그리고 원을 그리는 듯한 수면의 움직임과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이용해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의상을 더욱 빛나게 했다. 영상은 슈트 실루엣과 건축양식을 병치시켜 강렬한 미감을 토해낸다. 이를 보면, 패션과 건축의 컨버전스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융합의 시대, 자신들이 지금껏 구축해온 스타일의 어휘들을 함께 나누며 함께 진화해가는 패션과 건축의 미래는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환절기인 요즘 집처럼 견고하면서도 따스하게 우리를 안아줄 한 벌의 옷이 유독 눈에 걸리는 이유일 게다. <hr/>◆ 글_ 김홍기
국내 패션 큐레이터 1호. 패션평론가. 패션이 통섭적 사고를 이끌어내는 매개가 될 수 있도록 공연예술 및 건축, 문학, 역사, 인류학 등 다양한 인문학과의 만남에 혼신을 쏟고 있다. 미술사의 관점에서 복식의 역사를 풀어낸 '샤넬 미술관에 가다'의 저자이며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패션 디자인 스쿨' 등을 번역했다. 최근에는 '알렉산더 매퀸: 이 시대의 천재'를 감수하고 해제했다. 채정선 기자 est@<ⓒ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스타일부 채정선 기자 est@ⓒ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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