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의 음식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인근 금융회사의 직원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 각 두 명이 내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더니 '소개팅'을 소재로 대화를 시작한다. "허 과장은 이래 봬도 준비된 신랑감이야. 아파트도 한 채 있다구." 개중 고참으로 보이는 남자가 옆에 앉은 후배를 치켜 세운다. 맞은 편 두 여직원들이 '와~'하고 맞장구를 쳐준다. 허 과장이 겸양의 미덕을 발휘한다. "그거 순전히 빚으로 산 거에요. 골치아파요." 곁에 앉은 선배가 다시 거든다. "그래도 이번에 전세금 올려 받았다며?" "네, 그나마 그 2000만원으로 빚을 좀 갚았어요." 그 순간, 맞은 편 여직원들의 씁쓸한 웃음이 노골적이다. 한국은행이 통계 낸 은행 금리를 적용해 보면, 이번 전세 재계약으로 해마다 117만원이 세입자에게서 허 과장 주머니로 넘어간다. 현금 여유가 많았다면 허 과장은 이자율이 훨씬 높은 월세로 집을 돌렸을 텐데, 그랬으면 소득의 이전규모는 더 컸을 것이다. 이상은 '분노'라는 단어로 모든 현상이 설명되는 2011년 우리사회의 한 단면이다. '물가'는 분노의 자양분이자 기폭제다. 사람들은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면 분이 풀릴 걸로 믿었다. '해봐서 다 안다'는 이명박 정부가 '무능한' 진보정부를 따돌리고 어렵지 않게 국가운영을 꿰찬 배경이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그 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정치란 무엇인가.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고 자유를 신장하는 것? 그런 건 말 할 나위도 없는 정치의 필요조건이다. 거기에 더해 충분해지기 위해서는 공정하면서도 효율적인 자원의 배분으로 의식주를 충족시켜야 한다. 요체는 물가의 안정이다. 신주처럼 떠받들어 온 '성장과 고용'이란 이데올로기는 이제 종말을 고했다. 애초에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허구였다. 물가안정은 먼저 불공정한 자원배분으로 발생하는 빈부의 격차를 해소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유산자(有産者)가 무산자(無産者)의 재산을 빼앗아 가는 장치이자 , 정부가 서민의 재산을 취렴(聚斂)하는 세제(稅制)이기 때문이다. 최근 5년간 소득세 수입이 51%, 국세(國稅) 수입이 39.4% 증가하는 동안 전국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25.3% 늘어난데 그쳤다. 물가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정부의 재정을 건전하게 이끌 것이다. 통화를 팽창시키지 않고도 빚을 늘리고 지출을 확대할 수 있는 정부는 없기 때문이다.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독과점과 담합구조를 철폐해야 한다. 규제의 전봇대를 뽑아 내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경쟁을 촉진해야 한다. 생활비용이 안정되면 가계 성장의 희망이 살아날 테고, 청년들은 기꺼이 눈높이를 낮춰 직장을 얻을 테고, 적령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자 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직장을 잃으면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명동 한 복판의 번듯한 직장에 다녀도 물가가 불안하면 정부의 실정을 탓하기 마련이다. 물가를 잡지 못하면 그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편한 날이 없을 것이다. 물가는 도외시하고 성장과 고용에만 집착하는 정책은 마치 앙등하는 부동산 값에 지친 서민들에게 빚을 대주는 것과 매한가지다. 인플레이션은 최악의 포퓰리즘이다. 알코올에 중독된 경제에 또 다시 해장술을 부을 건가. 대통령 선거가 딱 1년 남은 지금, 대망을 품은 자들은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안근모 증권전문위원 ahnkm@<ⓒ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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