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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굽는 타자기] 판타지 문학의 대가가 전해주는…여성·언어에 대한 사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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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서 춤추다

"저는 여러분이 여자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죄수로 살거나 정신병질적인 사회 체계에 합의한 포로로 살지 않고 그곳의 원래 주민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곳에 편안히 자리잡고, 그곳에 집을 두고, 스스로 주인이 돼, 자신만의 방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판타지 문학의 대가인 작가 어슐러 K. 르 귄은 여성 교육의 산실이었던 밀스 컬리지의 1983년 졸업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졸업생들의 성공을 기원하기 보다는 맞닥뜨릴 수 있는 실패에 대해 얘기했다. 그 어두운 곳에서도, 우리의 합리주의 성공문화가 부정하며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하는 그곳에서도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희망은 눈을 멀게 하는 빛이 아니라 영양분을 공급하는 어둠에,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키우는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르 귄은 강조했다.


최근 출간된 ‘세상 끝에서 춤추다’에는 역대 미국 명사들의 명연설을 모은 ‘아메리칸 레토릭’에서 최고의 연설 100선에 꼽힌 이 연설문을 비롯해 르 귄이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발표했던 강연용 원고, 에세이, 서평이 수록돼 있다. 서평을 제외한 각각의 글은 주제에 따라 여성, 세계, 문학, 여행을 나타내는 네 가지 기호가 붙어 있다. 예를 들어 밀스 컬리지에서 한 ‘왼손잡이를 위한 졸업식 연설’에는 여성과 세계의 기호가 있다. 그는 서문에서 "특정 경향에 동조하지 않는 독자들이 피해 가는 데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의도를 설명했다.


네 개의 주제를 가로지르며 이 책은 SF, 판타지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는 르 귄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그의 대표작인 ‘어스시(Earthsea)’ 시리즈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불린다. 하지만 그의 글은 판타지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가 글을 쓴 주제는 인류학, 여성주의, 무정부주의, 심리학, 사회학 등을 아울렀다. 특히 성 역할에 대한 급진적인 변화를 그려냈다. 성 정체성과 사회적 규범, 페미니즘을 다루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에 담긴 폭넓은 주제의 글들은 소설만으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 같은 르 귄 특유의 철학과 세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한다.


남성이 중심이던 SF 소설에 페미니즘 개념을 도입한 그의 사유 과정도 엿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어스시 연대기는 마법사 게드가 활약하는 3부작에서 끝나지 않고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장편 ‘테하누’로 이어졌다. 그는 ‘젠더가 필요한가? 다시 쓰기’에 "나는 SF의 핵심 기능 하나가 바로 이런 종류의 질문 던지기라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뒤집고, 우리의 언어에 아직 가리킬 말이 없는 것을 은유하고, 상상으로 실험하기"라고 썼다.


그러면서 1986년 쓴 ‘글쓰기에서 여자들의 전망’을 통해 2000년도쯤엔 한 세대 이상 사회에서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세력으로 의식을 갖고 살아 있는 여성들의 통찰과 발상과 판단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0년에서도 다시 훌쩍 20년이 지난 지금, 르 귄의 전망은 이미 현실이 됐다. 그럼에도 1983년 밀스 컬리지 졸업식에서 그가 직시했던, 여성의 삶을 둘러싼 현실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르 귄의 글이 전하는 울림이 여전히 그대로인 이유다.



(세상의 끝에서 춤추다/어슐러 K. 르 귄 지음/황금가지/1만8000원)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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