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경영세습 능력부터 검증돼야
가업을 물려받은 장남은 보복 운전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경영 일선에서 퇴출됐다. 경영권을 잡은 막내 여동생은 내부 감사를 통해 큰오빠의 횡령 및 비리 사실을 적발해 검찰에 고발하고, 이 과정에서 장남은 막내 여동생의 측근이 사내 여직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최대주주였던 장남은 자기 아들 이사회 진입과 수천억 원의 배당을 요구하는 등 잇따른 주주제안으로 경영권을 흔들었고, 급기야 장녀와 손잡고 회사 과반 지분을 확보한 뒤 여동생을 대표직에서 끌어내렸다.
재벌을 소재로 한 드라마 줄거리가 아니다. 지난 10여년간 종합식품기업 아워홈에서 벌어진 남매간 경영권 분쟁 이야기다. 재계에서는 오너 2세로 경영권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다툼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최근에는 화장품 주문자위탁생산(OEM) 기업 콜마그룹에서도 남매간 경영권 분쟁이 벌어졌다. 윤상현 한국콜마홀딩스 부회장은 지난 5월 초 자회사인 건강기능식품 OEM 콜마비앤에이치 이사진 교체를 위한 임시주주총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콜마비앤에이치는 윤 부회장의 여동생인 윤여원 대표가 이끌고 있는데, 윤 대표는 오빠가 자신을 해임하기 위한 절차로 보고 '가족 간 경영 합의' 위반이라며 맞대응에 나섰다. 콜마그룹 창립자 윤동한 회장은 막내딸 편에 섰다. 윤 회장은 한국콜마홀딩스의 검사인 지정을 요구하는 한편, 지난달 윤상현 부회장을 상대로 2019년 증여한 콜마홀딩스 지분 전량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에 돌입했다. 여기까지는 흔한 재벌 드라마처럼 가족 간 경영권을 둘러싼 물고 뜯는 진흙탕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반전은 따로 있다. 후계자의 경영 능력을 평가하는 실적이다. 콜마비앤에이치는 윤 대표가 취임한 2020년 매출액이 6069억원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은 뒤 매년 역성장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6165억원으로 회복했지만, 이 기간 영업이익은 1092억원에서 246억원으로 급감했다. 코스닥 상장사인 이 회사 주식가격은 2021년 7만원까지 치솟았다가 올 들어 1만원대로 떨어졌다. 경쟁사인 노바렉스가 수출을 빠르게 늘리며 올해 주가가 60%나 급등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지주사인 콜마홀딩스 주가도 계속 내리막을 걸었다. 콜마홀딩스는 최근 글로벌 'K뷰티' 열풍의 산파 격인 화장품 OEM 한국콜마를 자회사로 두고 있어 '화장품 수혜주'로 꼽혔지만, 콜마비앤에이치 실적 부진이 기업가치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부터 콜마홀딩스 지분을 사들인 미국 행동주의 펀드 달튼 인베스트먼트가 올해 주총을 통해 본격적인 경영에 참여한 배경일 것이다.
반면 아워홈의 막내딸인 구지은 전 부회장은 경영권을 잡은 첫해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지난해 2조원 가까운 매출로 창사 이후 최대 실적을 냈다. 이 기간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2배 늘어난 1000억원에 가깝다. 그런데도 아워홈은 최근 장남과 장녀가 절반이 넘는 합산 지분을 한화그룹에 매각했다. 아워홈의 미래는 예단할 수 없다. 다만 한화 오너 2세 김동선 부사장이 이끄는 식품사업의 경우 2020년 급식업체 푸디스트를 사모펀드에 1000억원에 매각했는데, 5년 만에 다시 경쟁사인 아워홈 지분 58%를 8배 넘는 가격에 인수한 경영 판단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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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그동안 총수일가의 경영권 다툼을 냉소적으로 바라봤다. 유교권 문화인 탓에 부모에 대한 효도와 우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면서다. 특히 총수 자녀의 경영권 승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크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17년 대학교수 등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기업의 경영 세습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응답(56.0%)이 바람직하다는 답변(14.0%)보다 4배 높았다. 그동안 오너 2·3세들의 갑질 논란 등 사건사고가 잇따른 데다, 뚜렷한 실적 없이 이른 나이에 초고속 승진해 기업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사례가 빈번했던 탓이다. 총수일가의 지분 승계는 편법 증여가 아니라면 시장경제체제에서 당연할 수순이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는 능력부터 검증해야 할 것이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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