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사회가 마주한 깊은 우울
웹소설 아포칼립스 장르 유행
민주주의 틀 속에서 경험한 절망
인문학적 상상력 통해 극복해야
자유란 머릿속에서 생각한 걸 실제 현실로 구현하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뜻하는 대로 행할 수 있고, 상상한 대로 실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를 느낀다. 자유의 반대는 우울이다. 바라는 바를 이루려 아무리 애써도 되는 일이 전혀 없을 때, 되려는 기미조차 엿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우울에 포획돼 답답함, 무력감, 공허함, 외로움, 두려움에 빠져든다.
우울은 슬픔이 아니다. 슬픔은 기분이라 대개 순간적이다. 주변 환경의 작은 변화로도 쉽게 평온과 기쁨으로 변한다. 그러나 우울은 극도의 부자유 탓에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상태, 스스로 삶의 의미를 이룩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우울은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삶의 조건이고, 마음의 역량마저 바닥난 한 존재론적 상황이다. 나날이 생활이 나빠지는 몰락의 세계, 뜻을 펼칠 수 없는 억압적 사회를 바꾸지 않는 한 우울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한국의 우울증 환자 숫자는 매년 증가 중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 수는 2020년 약 87만명에서 2023년 약 109만명으로 25% 증가했다. 특히, 10~30대까지 젊은 세대는 우울증 환자 증가율이 50%를 넘어섰다. 아이가 밝게 살기 어렵고, 청년이 미래를 비관하는 세상이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의 마음 상태는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 어둠은 청년들이 주로 즐기는 웹소설에서 드러난다. 미래를 저주해서 종말을 예감하고 상상하는 아포칼립스 장르가 몇 해째 유행 중이다. 아포칼립스 소설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대재앙 또는 파국의 세계를 그려낸다. 굶주림과 궁핍함이 일상이 되고,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며, 재난과 전쟁이 넘치는 곳에서 사람들은 안간힘을 다해 어떻게든 안온한 일상을 돌려받고 지속적 평화를 되찾으려고 애쓴다. 현재 웹소설 플랫폼에서 '아포칼립스'나 '종말'로 검색하면, 종말 세계를 그려낸 작품을 각각 700편 이상 만날 수 있다.
무엇이 종말을 가져올까.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바이러스 창궐,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반란, 식량과 자원의 고갈 등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사람들이 경고하고 우려하는 위협이다. 무능하고 타락한 정치, 소수에게 이익을 몰아주는 쪽으로만 작동하는 경제, 권력자 편만 드는 사법과 행정 등으로 대다수 사람이 '이따위 세상, 망해 버려라'를 외칠 때, 아포칼립스는 현실이 된다. 청년들 마음속의 우울이 세상의 어둠으로 변하는 것이다.
올해 초, 세계적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상상할 수 있는 게 종말밖에 없는 이들을 위한 에세이 한 편을 발표했다. '지금 이후의 세상을 꿈꾸려면, 민주주의엔 인문학이 필요하다'라는 글이었다. 앞날이 깜깜해 무엇도 희망할 수 없고, 아무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들에게 버틀러는 역설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만약 우리가 미래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상상하는 중이다. 비록 희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일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앞날이 어둡다고 생각하는 건 지금껏 우리 삶을 지탱하던 사고의 틀과 해석의 형식이 붕괴해 더 이상 미래를 그려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세상은 민주주의란 틀 속에 있었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의 동등성을 보장하고, 약자들이 더 나은 미래를 예감할 수 있는 최소의 정의를 제공하며, 전면적 폭력을 제한함으로써 협력과 우애의 영역을 확장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세상 종말을 상상하는 일은 세상의 생존이나 지속을 나타내는 신호일 뿐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으로 향하는 문턱이다." 만약 당신이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다른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촉발하는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과거의 경험이 안 통하는 곳에 미래의 꿈을 덧대고, 논리의 다리가 끊어진 절벽에 상상의 다리를 놓으라는 말이다.
이성적 인식이 전혀 닿지 않고, 심지어 상상조차 못 미치는 미래가 실재한다면, 그때 비로소 세상은 진짜 종말을 맞이한다. 그림조차 떠올릴 수 없는 미래는 영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존재를 공포에 질식시킨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력의 바다가 마르고, 이야기의 우물이 고갈되는 그런 세계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숱한 작가들이 보여주듯, 종말의 형태로라도 미래를 말할 수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트럼프 세계는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부정하고 파괴한다. 그건 세계를 예속해서 미국의 힘에 굴복시키고, 다수를 쥐어짜서 소수에게 부를 몰아주며, 기후 변화를 가속해 환경재앙을 일으킨다. 그것은 착취와 파괴가, 대립과 갈등이, 침략과 전쟁이 일상화한 세상을 만든다. 이것이 아포칼립스다. 조폭이 날뛰는 무협의 세계, 군벌이 창궐하는 판타지의 세계, 괴물이 곳곳에 출몰해 시민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종말의 현실이다.
일찍이 카프카는 이런 삶의 상황을 두고 "우리는 칼날 위에서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권력의 칼날에 삶이 갈기갈기 찢기거나 파괴될 가능성에 노출된 상황, 위험과 위협이 노골화해 삶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힘 있는 자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국민을 협박하고, 법을 손에 쥔 일부가 상식을 무시하고 나머지 전부의 운명을 정하는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붕괴 직전의 민주주의엔 무엇보다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를 묻고, 그 가능태를 시공간 위에 구현한다. 특히, 우리에겐 카프카가 보여주었듯, "용기가 필요한 상상, 처음엔 무섭고 부조리하게 보일지 모르는 상상"이 요청된다. 모든 게 무너진 세계에서 종말 너머를 떠올리는 힘,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는 새로운 비전 없이는 민주주의는 이어질 수 없다.
무도한 12?3 계엄은 대통령 탄핵으로 종결됐고 세상은 대통령 선거로 떠들썩하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낡은 법이 무너져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종말론적 무법 상태를 겪었다. 이제 우리는 이제 상상의 힘을 빌려 밝은 날을, 민주주의를 더욱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떠올려야 한다. 버틀러는 말한다. "변혁은 집단적 상상 없이 불가능하다." 문학이 그 길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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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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