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만에 흑전에도 영업적자·부채 산더미
전문가들 "전기요금 정상화 우선돼야"
민간 투자 활성화 방안엔 의견 엇갈려
원활한 전기확보를 위한 국가기간전력망확충특별법이 지난달 말 국회를 통과하며 송전선로를 빠르게 구축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는 마련했다. 하지만 투자 주체인 한국전력이 200조원의 누적 부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복병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전의 지속적인 재무 악화는 전력망 유치와 송전선로 확충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신재생 에너지 확대와 맞물려 송전 인프라 개선이 시급한 상황에서 한전이 재정난을 이유로 제때 투자를 못 할 경우 국가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전은 지난해 연결 기준 영업이익이 8조3489억원을 거두며 4년 만에 흑자 전환했다. 가격 인상을 단행한 영향이 컸다. 하지만 그동안 누적된 적자를 감안하면 지난해 실적 개선은 별 도움 되지 않는다. 2021년 이후 누적 영업적자는 34조7000억원,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 부채는 204조원에 달한다. 국제 연료 가격 급등과 전기요금 인상 지연이 맞물리면서 2022년 한 해에만 32조원의 적자가 발생했으며 이후에도 적자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한전의 구조적 문제는 전력 구입과 판매 단가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해 구입단가(RPS 포함)는 1kWh당 134.8원인 반면 판매단가는 162.9원이었다. 국제유가 상승이나 발전 연료비가 상승하는 경우 원가에 못 미치는 가격에 전기를 판매하는 역마진 상황에 취약하다.
한전 관계자는 “최근 몇 년간 전기요금이 기형적으로 묶여있는 상태에서 원가가 급격히 상승해 적자가 발생했다”며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기요금 정상화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정 악화는 전력 관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선 전력망 유지보수와 송전설비 증설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는 악순환을 야기할 수 있다. 특히 정부의 탄소 중립 정책에 따라 신재생에너지 발전은 확대되는데, 이에 필요한 송전 인프라 구축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자금 부족으로 신규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태양광, 풍력 발전은 무용지물이 된다. 더군다나 신재생 발전은 주로 지방에 집중돼 있다. 한전 부실은 지방의 잉여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송전선로 확충을 막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송전선로 문제가 국가 에너지 정책과 직결된 사안인 만큼 전기요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강조한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기요금 정상화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라며 “문제는 주택용, 일반 요금을 올려야 하는데, 그간 정부가 만만한 산업용 전기요금만 지나치게 올려 산업체들은 자가 발전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전기요금부터 바로잡아 한전이 전기에 대한 제값을 받고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한전은 걱정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자본 잠식 상태다. 이제 다른 길이 없다”며 “한전이 망하면 당장 우리 집에 전등이 안 들어오는 것이다. 국가 예산으로 한전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전이 최근 배당을 실시한 점은 예산 지원의 걸림돌로 꼽힌다. 한전은 지난해 8조원대의 영업이익을 내면서 4년 만에 적자에서 벗어났는데, 배당을 실시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주당 배당금은 214원으로 시가 배당률 1.0%, 총 배당액은 1374억원이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모럴해저드'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상장 회사로서 일부 배당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며 “부채가 많은 상황에서 배당하는 것이 불합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시장에서 신용을 회복하고 재무 상황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다만 그 수준이 과도해선 안 된다”고 했다.
한전은 “전력망 확충 등에 필요한 필수 투자 재원을 고려한 최소 수준의 배당”이라며 “장기간 믿고 투자해 준 투자자에 대한 작은 규모지만 이익을 환원하는 주주가치 제고가 필요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부에선 전력망에 대한 민간 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독일의 테네트는 네덜란드 정부 소유의 기업이지만 독일의 북부와 중부 지역 송전망을 운영하며 민간 자본을 유치해 전력망을 확충하고 있다. 독일 정부의 규제 하에 여러 민간 송전망 운영사가 경쟁하고 적극적인 투자를 진행한다. 영국의 내셔널 그리드는 전력 산업을 민영화해 효율적인 송전망 운영과 재생에너지 통합을 위한 투자를 지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윤제용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는 “옛날엔 안정적인 전기 공급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전력 시스템이 가장 효율적이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에너지 대전환의 시대이기 때문에 재생에너지와 같은 새로운 에너지 기술이 들어오는 만큼 전력 시스템에서도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판매와 배전 부분에서 민간투자를 허용해 활발한 소매시장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민간의 전력망 투자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이덕환 교수는 “민간에게 기회가 열려도 현재 국내엔 투자 여력이 있는 기업이 없다. 제도도 마련돼있지 않다”며 “한국은 미국과 달리 규모가 작기 때문에 민간사업이 전력 사업을 할 수 있는 틈새가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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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훈 교수는 “지금 한전은 절체절명의 위기이기 때문에 일부 구간이라도 민간 투자를 허용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라먼서도 “다만 계약 및 운영 방법, 요금 설정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먼저 송전망 설치를 위한 예산 현실화, 규제 완화 등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심성아 기자 hear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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