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제목을 따온 이 책은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가 “천사들의 엄격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제한적인 관점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자이자 문학 비평가, 철학자이기도 한 윌리엄 에긴턴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 보르헤스, 불확정성 원리를 주창한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라는 세 사람의 삶과 저작을 독창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이들의 주장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세계에 투사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세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관계”로서만 존재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보르헤스의 가정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마법사는 강력한 마법을 부려 헛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도록 그 자신마저 속이는 마법사였다. 그는 “우리가 꼭 그렇지 않은가?”라고 물었다.……“우리는 세계를 꿈꿔왔다. 우리는 세계가 공간상으로 고정되어 있고 불가사의하며 눈에 보이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시간상으로 영속적이라고 꿈꿔왔다.” p.22-23
칸트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마음속에서 그 사물에 시공간적으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하게 된 그것의 별형이다. p.24
지식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이지만, 실재의 궁극적 성질은 그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p.27
우리가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실재란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부단히 넓어지는 미래의 발견을 가로막고 그럼으로써 그 벽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p.60
우리는 항상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자연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말하는 데에 그치게 된다. 우리가 안개상자 속에서 전자의 경로를 보는 까닭은 입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연속으로 이동한다고 우리의 이론이 일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연속성은 전자의 실재를 구성하는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실재를 구성하는 일부일 수 있다. p.252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지켜보고 있으면 양자 냄비가 끓지 않는 경우처럼 위와 같은 결과가 역설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간단하다. 우리가 실재에 대한 기대-실재는 단일하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리라는 기대-를, 시공간상 다른 점들을 연결하는 것일 뿐인 관찰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p.256
우리의 자유,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의 물질적 존재 안에서 찾아야 할 것도 아니고, 그 존재에 매이지 않은 유령 같은 실체도 아니다. 자유와 책임은 다르게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할 줄 아는 존재의 필수적인 가정이자, 지금 이 삶을 여러 갈래의 길 중 내가 선택한 하나의 길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다. p.367
우리 주위에는 무의식적인 편향이 넘쳐난다. 일례로 로벨리가 형이상학적 편견이라고 명명한 것이 있다. 실재가 바깥에, 우리와의 상호작용과 독립해서 존재하며, 그 존재 방식이 지구 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삶과 일치한다는 믿음이다. 공간상 펼쳐져 있고 시간상 연속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믿음, 세계가 우리의 예상과 일치하기를 바라는 이 욕구는 대단히 강해서 그것을 뒷받침하기만 하면 어떤 구성 개념도 무모하지 않다고 본다. p.372
천사들의 엄격함 | 윌리엄 에긴턴 지음 | 김한영 옮김 | 까치 | 420쪽 | 2만3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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