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호주 '펜폴즈(Penfolds)'
설립 180주년 맞은 호주 국보급 와이너리
실험·호기심·타협하지 않는 품질 토대로 '우뚝'
'그랜지' 호주 문화유산 등재된 아이콘 와인
"진정 훌륭한 와인 양조를 꿈꾸는 와인메이커라면 무엇보다 비옥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랜지(Grange)'는 호주에서 와인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름이다. 그랜지는 호주 와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상징하는 와인으로 호주 와인업계에는 자부심을, 애호가들에게는 설렘을 안겨주는 이름이다. 그랜지를 세상에 선보인 '펜폴즈(Penfolds)'의 초대 수석 와인메이커 막스 슈버트(Max Schbert)는 관습대로 틀에 박힌 와인 만들기를 거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경계 없는 상상력과 끝없는 실험정신을 토대로 그랜지라는 빛나는 유산을 탄생시켰고, 펜폴즈가 오늘날까지 호주의 국보급 와이너리로 명성을 쌓아올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낯선 땅에서 빚어낸 개척자의 와인
그랜지의 토양이 된 펜폴즈의 시작도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으로 무장한 개척자에 의해 비롯됐다. 1844년 영국인 부부 크리스토퍼 펜폴드(Christopher Rawson Penfold)와 메리 펜폴드(Mary Penfold)는 의사로서의 안정적인 삶 대신 새로움을 찾아 호주로 먼 길을 떠난다. 초기 식민지 시대 남호주에 도착한 부부는 애들레이드(Adelaide) 인근에 500에이커(약 61만평)에 달하는 비옥한 토지를 구입해 포도밭을 일군다. '매길 에스테이트(Magill Estate)'로 불리는 이 지역은 오늘날까지 양질의 포도를 생산하며 펜폴즈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중추로 활약하고 있다.
의사였던 크리스토퍼 펜폴드가 포도밭을 일구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당시 와인이 지금과 같은 기호식품을 넘어 의학적인 효과가 있는 치료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펜폴드 박사 역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약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주정강화 와인을 만들었다. 주정강화 와인(Fortified Wine)은 일반 와인에 브랜디 등 증류주를 첨가해 알코올 도수를 높인 것으로, 일반적인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11~15도(%) 정도인 데 반해 주정이 더해진 만큼 알코올 도수가 20도 전후로 높다.
와인에 주정 강화 개념을 처음 적용한 것은 영국인들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과거 와인이 오크통에 담겨 유통되던 시절에는 고온으로 와인의 품질에 이상이 생기는 일이 잦았다. 이는 와인을 수입에만 의존해야 하는 영국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영국 중개상인들은 와인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브랜디를 첨가하면 미생물의 활동이 억제돼 품질이 장기간 보존된다는 사실을 착안, 주정강화 와인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도 최고의 주정강화 와인으로 꼽히는 셰리(Sherry)와 포트(Port) 와인의 생산국은 각각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지만 최대 소비국은 예나 지금이나 영국이다.
사실 펜폴드 박사는 호주로 이주하기 전까지 와인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초보 양조가였다. 하지만 주정강화 와인의 종주국격인 영국 출신으로서 다양한 음용 경험과 호기심 넘치는 개척자 기질 등을 토대로 약용 와인 양조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가 만든 주정강화 와인은 높은 인기를 얻으며 치료용을 넘어 음용 목적으로 소비가 번질 정도로 수요가 늘었고, 펜폴드 부부도 포도밭을 확장하고 와인 생산을 늘리게 된다.
크리스토퍼가 세상을 떠난 1870년 이후에는 아내인 마리가 와이너리 운영을 주도하며 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와인 양조에 있어 블렌딩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리슬링(Riesling)과 클라레(Claret) 등으로 재배 품종을 확장하기도 했다. 메리 펜폴드가 와이너리를 이끌던 1881년 당시 펜폴즈는 10만7000갤런(약 40만5000ℓ)의 와인을 매길 에스테이트에 보관했는데, 이는 당시 남호주에서 생산된 모든 와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메리의 은퇴 이후에도 그의 딸과 사위가 가업을 이어받으며 와이너리는 승승장구했다. 1907년 펜폴즈는 남호주에서 가장 큰 와이너리가 됐고, 1920년대에는 호주에서 팔리는 와인 두 병 가운데 한 병은 펜폴즈의 와인일 정도로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다고 한다.
국보가 된 와인 '그랜지'
펜폴드 부부가 호주 땅에 처음 발을 내딛고 100년 이상 흐른 1950년은 펜폴즈의 상징인 그랜지의 이야기가 시작된 해다. 호주 와인시장은 당시에도 여전히 주정강화 와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볍게 마실 수 있는 테이블 와인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는데, 시장의 변화를 감지한 펜폴즈는 선진화된 와인 생산 방안 등을 확보하기 위해 와이너리 최초의 수석 와인메이커인 막스 슈버트를 유럽으로 파견한다.
가벼운 테이블 와인으로 시장전략을 변경하려던 와이너리의 계획과는 달리 슈버트는 장기간 숙성이 가능한 프랑스 보르도의 강인한 와인 스타일에 매료됐다. 이듬해 호주로 돌아온 그는 최소 20년 숙성이 가능한 장기 숙성 와인을 목표로 양조 실험에 돌입했고,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완벽하게 익은 매길 에스테이트의 고품질 쉬라즈(Shiraz)를 사용해 '그랜지 에르미타주(Grange Hermitage)'를 탄생시킨다. 그랜지 에르미타주는 프랑스어로 곡물창고를 뜻하는 그랜지와 시라(Syrah=쉬라즈) 품종의 고향이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론(Rhone) 지방의 에르미타주 마을을 벤치마킹해 지은 이름이다. 다만 유럽연합의 원산지 규정 때문에 1990년부터는 이름에서 에르미타주가 삭제됐다.
하지만 슈버트의 기대와는 달리 펜폴즈 이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무겁고 타닌이 강한 그랜지는 애초에 이사회가 요구한 음용성 좋은 가벼운 와인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랜지의 상업적 생산은 시작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57년 이사회는 결국 그랜지의 생산을 중단시켰다. 이사회의 결정에도 그랜지의 가능성을 확신한 슈버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비밀리에 숨겨진 빈티지(1957·1958·1959) 그랜지를 생산했고, 1960년 이사회에 그랜지의 재평가를 요구해 재생산 결정을 이끌어낸다.
이사회가 시장 트렌드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그랜지의 생산을 다시 허가한 건 결국 외면할 수 없는 수준의 높은 품질 때문이었다. 고품질의 숙성된 레드 와인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슈버트가 입증해낸 것이다. 재생산 이후 그랜지는 국내외 와인 어워드에서 다양한 수상 기록을 세우며 펜폴즈와 호주의 대표 와인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탄생 50주년을 맞은 2001년에는 와인으로는 유일무이하게 남호주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랜지는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를 중심으로 펜폴즈의 남호주 지역 여러 포도밭에서 생산된 최상급 쉬라즈만 선별해 만들어진다. 특정 포도밭의 포도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년 품질에 따라 다양한 밭에서 최상의 포도를 수확해 블렌딩을 통해 최고의 맛을 뽑아내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랜지는 잘 익은 베리류의 과일향을 중심으로 오크 숙성으로 발현된 복합적인 부케가 더해지며, 이후에는 꿀과 자몽의 아로마, 구운 육류의 풍미, 고소한 견과류의 뉘앙스 등이 복합적으로 느껴진다. 여기에 부드러운 타닌은 와인이 강건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조슈아 임 펜폴즈 브랜드 앰버서더는 "그랜지는 보르도 와인처럼 저숙성 상태에서 마시게 되면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없어 4~5년가량 숙성해 출시한다"며 "올해 한국 시장에 선보인 와인도 2019 빈티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호주에선 포도 본연의 향이 오크 풍미에 잠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새 오크통 사용을 극도로 꺼리는 편이지만 그랜지는 새 오크통에도 잠식되지 않는 최상급의 포도만 사용하는 만큼 새 오크통 숙성을 통해 복합미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실험정신의 산물 '빈 시리즈'
그랜지가 펜폴즈의 정점에 있는 와인임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펜폴즈가 그랜지라는 하나의 스타에만 의존하는 와이너리는 결코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다양한 '빈(BIN)' 시리즈다. BIN은 원래 '배치 식별 번호(Batch Identification Number)'의 약자로 와인 숙성고 내 공간 분류 번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59년 슈버트가 비밀리에 그랜지 실험을 진행하면서 BIN과 숫자를 조합해 와인의 이름으로 사용하게 됐다.
펜폴즈에는 빈에 숫자가 더해진 와인들이 여러 종 있는데, 숫자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 헷갈릴 수 있다. 이 중 'BIN 389'는 '베이비 그랜지'로 불리는 와인이다. 그랜지가 되기에 조금 모자란 포도를 사용하는 데다 그랜지를 숙성했던 오크통에 숙성시켜 그랜지의 에센스가 묻어있는 와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BIN 389의 라벨에는 '카베르네 쉬라즈(Cabernet Shiraz)'라고 품종이 표기됐는데, 이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쉬라즈를 혼합해 만들었다는 의미다. 펜폴즈를 비롯해 호주에선 2~3종의 포도가 블렌딩됐을 때 사용량이 많은 품종 순으로 품종명을 명시하는데, 그르나슈(Grenache)와 쉬라즈, 무르베드르(Mourvedre)를 섞어 만든 'GSM'이 대표적이다.
화이트 와인 중에는 '야타나 빈 144(Yattarna BIN 144)'를 눈여겨볼 만하다. 호주 원주민어로 '점차적으로'라는 뜻을 가진 BIN 144는 144번의 실험 끝에 만들어진 와인이라고 한다. 호주 최남단 태즈메이니아 지역에서 재배한 샤르도네(Chardonnay) 와인으로, 서늘한 기후로 인해 포도가 천천히 익어가는 모습을 이름에 담았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고품질 샤르도네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 펜폴즈의 화이트 그랜지와 같은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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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폴즈는 호기심과 실험정신이라는 '펜폴즈 DNA'가 있었기에 180년의 역사가 가능했다고 강조한다. 펜폴즈의 현 수석 와인메이커인 피터 가고(Peter Gago)는 말했다. "혁신적인 비전과 전통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의 결합이 펜폴즈 와인의 지속적인 진화 배경이며, 펜폴즈는 앞으로도 새로운 연결과 협업을 통해 진화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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