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받으려면 준비서류만 10여종
반환에 드는 시간·비용은 국민들이 부담해야
이용자 불편 그대로 방치하는 전세보증 제도
"후진국 국민은 손해 안 보려 공부해야" 한탄
여러분이 전세를 살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계약 종료일이 다가왔습니다. 집주인에게 내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연락을 받지 않네요. 혹시 ‘전세보증’에 가입했으니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큰 오산입니다. 한국에서는 전세보증에 가입해도 돈을 돌려받기 위해 복잡한 절차와 각종 비용을 내야 합니다. 방법을 모르면 인터넷을 뒤져가며 직접 공부까지 해야 하고요. 왜 전세반환보증제도는 이렇게 어려울까요?
지난 28일 국회는 여야 합의로 전세사기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인정범위를 늘리고, 해당 주택을 피해자에게 공공임대로 최대 20년까지 제공하는 게 골자입니다. 개정안 통과에 따라 피해자들은 임차보증금이 5억원 이하인 경우 피해주택에서 LH공공임대 형태로 기본 10년, 원하면 추가로 10년을 거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전세사기특별법이 처리돼 피해자들은 보다 폭넓은 지원을 받게 됐습니다. 그간 전세사기 피해에 대한 경각심도 높아졌고요. 각종 제도 개선논의도 이뤄졌습니다. 우리 부동산 시장의 전세제도는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요?
내겐 너무 어려운 전세
아직 전세제도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바로 ‘복잡함’이죠. 여러 언론 기사나 기관의 제도 홍보 글에는 ‘반환보증에 가입하고 이행청구를 하면 된다’는 말만 나와 있어 매우 간단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막상 돈을 돌려받으려면 까다로운 준비과정을 거쳐야 하죠. 예를 들면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보증으로 돈을 받기 위해 아래와 같은 서류를 미리 준비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보증채무이행청구서
전세계약서원본
주민등록초본
전세계약이 해지 종료됐음을 증명하는 서류
주택임차권등기가 등재된 등기사항전부증명서
대외변제증서
계좌입금의뢰서(통장사본첨부)
배당표 등 전세보증금 중 미수령액을 증명하는 서류(경·공매 시)
명도확인서 및 퇴거(예정) 확인서
주택임차권등기명령취하 및 해제신청서와 관련 위임장
배당금 수령 관련 위임장
인감 증명서 2부
신분증 사본
각종 이행 청구서류는 본인이 직접 작성해야 하고요. 전세금을 돌려받아야 하는 당사자가 직접 관공서를 돌아다니면서 구해야 합니다. 서류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하고요. 바쁜 와중에 서류를 쓰고 준비해야 하니 소요되는 시간과 당사자가 받을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에 완벽하게 서류를 준비했다면 다행이지만, 조금이라도 오류가 있거나 부실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보완 절차까지 거쳐야 하고요.
집주인 연락 안 받으면 더 복잡해
이마저도 ‘집주인이 연락을 잘 받아줬을 때’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집주인과의 연락이 두절된다면 문제가 훨씬 복잡해집니다. 보증금을 받으려면 ‘전세계약이 해지 종료됐음을 증명하는 서류’가 필요한데요. 전세계약 종료 두달 전에 반드시 임대인에게 계약종료 의사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류의 효력이 발생하려면 임대인의 답장이 필요합니다. 서류, 통화, 문자 어떤 수단이건 “알겠다”는 집주인의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거죠.
집주인이 연락을 받지 않으면 ‘공시송달’이라는 또 다른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공시송달은 재판절차나 행정절차에서 송달할 주소를 알 수 없는 경우에 송달할 서류를 게시해 놓고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송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입니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소송 홈페이지를 통해서 진행할 수 있는데요. 관할법원을 찾는 단계부터 신청취지 작성, 소명서류 제출, 접수증명신청서를 생성하는 것까지 어렵고 복잡합니다. 소송비용도 본인 부담이죠.
바로 공시송달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법원으로부터 공시송달 판결문을 받아내려면 집주인에게 내용증명을 여러 차례 보냈으나 거절당했음을 또 증명해야 합니다. 물론 집주인의 정확한 주소를 모를 수도 있겠죠. 이 경우에는 집주인의 정확한 주소를 알아야 하므로, 내용증명을 보낸 뒤 반송된 서류를 구해야 합니다. 이 서류를 임대차계약서와 신분증을 챙겨 직접 주민센터로 가면 그제야 집 주소를 알 수 있습니다.
"전세금 받으려 공부했다"…분통 터지는 세입자들
전세보증을 이용했던 국민들은 까다로운 절차에 혀를 내두르고 있습니다. 지난달 공시송달을 거쳐 전세금을 받았다는 김지수씨(29·가명)는 “전세금을 돌려받으려고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올려놓은 블로그와 유튜브를 보며 절차를 공부했다”면서 “내가 내 돈 돌려받겠다는데 왜 이렇게 비용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화가 났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블로그, 유튜브에는 전세금을 돌려받기까지 얼마나 번거로운 절차를 거쳤는지 등을 소개하는 글이 많습니다.
전세금을 돌려받는 제도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우선 ‘보험’이 아니라 ‘보증’이어서 그렇습니다. 보험은 계약자가 통제할 수 없고 우연히 발생하는 손실을 담보하는 금융상품입니다. 비교적 자신의 손실을 증명하기 쉽기 때문에 복잡한 서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반면 보증상품은 보험계약자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손실을 담보합니다. 보증상품을 판매한 기관들은 사실 확인을 꼼꼼하게 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복잡한 절차가 만들어지는 거죠.
법적 효력 문제도 있습니다. 집주인 연락 두절로 공시송달을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대표적이죠. 전세는 어디까지나 개인끼리 자유롭게 맺는 ‘사인 간의 계약’입니다. 그리고 법원에서는 일방적 통보만으로는 계약종료 의사가 전달됐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보증상품을 만드는 기관에서도 ‘반드시 집주인의 답장을 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죠.
후진국형 전세보증제도, 이대로 괜찮을까
그럼 현재 전세제도는 어쩔 수 없는 걸까요? 전세보증 담당자들은 아시아경제와의 통화에서 “이용자들이 최대한 제도를 잘 알아보고 미리 숙지해두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세는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된 주거제도입니다. 수많은 국민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고 불편함까지 겪는다면 제도를 방치하기보다는 편리하게 개선해야겠죠. 국가로부터 보증상품에 가입했는데, 돈을 받기 위한 시간과 비용을 국민이 온전히 떠안는 시스템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올 초 국토교통부의 한 관계자는 본지 기자에게 복잡한 전세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국민들이 제도에 무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법이 알아서 국민들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반면 후진국에 사는 국민들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법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려운 전세제도가 바람직한 건 아니다.”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