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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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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에게 진급 불발 토로하고 연행한 우경윤
체포 우려해 강북 강변로 동서로 배회한 노재현
장태완이 서빙고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장태완은 오래전부터 전두환과 껄끄러운 사이였다(上)>에 이어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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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승화 참모총장이 대통령 시해 사건에 깊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났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사건을 빨리 종결하기 위해 연행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 대통령은 내게 직접 보고할 사항이 아니니까 국방부 장관을 통해 보고하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 쉽게 재가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전두환은 당황했다. 여러 가지 예를 들며 다시 설득에 나섰다. 시해 사건 수사는 자기 책임이니 국방부 장관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며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 최 대통령의 태도는 완고했다. 정상적 보고가 이뤄져야 한다는 자세를 고수했다. 12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1주일도 안 된 때였다. 군 내부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조언을 듣지 않고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수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국가안보 총책임을 지고 있는 계엄사령관 문제를 그보다 계급이 낮은 소장 말만 듣고 결정할 수 없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접견실에서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귀엣말로 정 총장 연행 과정에서 벌어진 총격전과 우경윤 대령 중상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는 더 이상 설득해봤자 대통령이 재가해 줄 것 같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서둘러 30경비단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장군 등은 오후 8시 40분경 전두환이 모습을 나타내자 반갑게 맞았다. 이내 대통령 재가도 없이 계엄사령관을 연행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대책 회의를 열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총장 연행을 자기 개인적 의견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가 함께 가서 말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는 군 최고 통수권자에 대한 집단행동으로 나타날 위험이 있었다. 나중에 불법적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했다. 이들은 도청 장치를 통해 육군본부와 수경사령부의 움직임을 죄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시 총리공관으로 가서 대통령에게 재가를 요구하기로 했다.


*장태완은 오후 8시경 경비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지하상황실로 직행했다. 그곳에선 차에서 지시한 사항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실에 대기하고 있는 예하대 지휘관은 황동환 방공포병 단장뿐이었다. 장세동, 김진영, 조홍 대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태완은 직감적으로 하나회의 소행임을 알았다. 하지만 원만한 부대 수습의 여지를 갖기 위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총장 구출 등을 지시하고 2층 집무실로 올라가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총장공관에 건 전화는 불통 상태였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장태완은 헌병 한 소대, 전차 한 대, 경장갑차 한 대, 2.5톤 트럭 한 대, 사이드카 두 대, 앰뷸런스 한 대로 특수임무 조를 편성했다. 헌병단장이 행방불명이라서 총지휘관으로 헌병대 부단장 신윤희 중령을 임명했다. 즉시 총장공관으로 출동해 총장 소재를 확인하고, 현지 상황을 도착 즉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신 중령은 육사 21기로, 하나회 일원이었다. 뒤늦게 수경사 내부의 반란군 측 통합 책임자였던 사실이 드러났다.


*장태완은 신윤희 중령이 미덥지 못했다. 참모총장이 연행돼 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어 오후 8시 40분경 총장공관으로 향했다. 그는 입구인 한남동 굴다리 부근에 도착했을 때 육군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으로부터 총장 납치 소식을 전달받았다. 장태완은 공관 입구에서 내려 신윤희 중령에게 지시했다. "저 안에 들어가 있는 놈들을 모조리 때려잡도록 해! 해병대도 계속 저항하면 무조건 밀어버려!" 장태완은 공관을 경비하는 해병대 병력도 총장을 납치해간 측과 한편인 줄 착각했다.


*우경윤, 허삼수 대령은 이날 오후 6시 50분쯤 총장공관 입구에 도착했다. 그들이 타고 있던 슈퍼살롱 승용차는 그대로 정문 경비를 통과했다. 그러나 뒤따라온 마이크로버스 두 대는 통과되지 않았다. 교대 병력치고 그 수가 너무 많아 제지당했다. 그러자 33헌병중대는 정문 경비병 세 명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자기 병력으로 정문을 관리하게 하고 정문을 통과해 공관 건물 현관 앞까지 들어갔다.


*정승화 총장은 이날 준장 진급자로 발표된 처남 신대진 대령의 진급을 축하하는 동시에 모처럼 장모님에게도 인사를 드리기 위해 처남 집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우경윤 대령은 정승화 총장을 보자마자 진급할 줄 알았는데 탈락했다는 아쉬움을 늘어놓았다. 정 총장은 겨우 안면이 있는 장교가 대뜸 그런 말부터 꺼내어 기분이 상했다.


*허삼수 대령은 정승화 총장에게 "김재규에게 돈을 받지 않으셨다면 저희 사무실로 가셔서 그런 사실이 없다는 걸 확실하게 증언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정 총장은 "대통령이 데려가도 좋다고 승인했나?"라고 물었다. 허 대령은 우경윤 대령과 함께 "네, 승인하셨습니다"라고 거짓말했다. 정 총장은 직접 확인해보겠다며 부관인 이재천 소령에게 총리공관이나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하라고 시켰다. 순간 부관실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보안사 수사관 한 명이 전화를 걸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공관 건물 밖에서도 M16 소총 소리가 났다. 우 대령과 허 대령은 바로 일어나 정 총장 좌우에 달라붙어 각각 겨드랑이를 끼어 잡았다. 정 총장은 밖에서 공관원들과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판단해 "사격 중지!"라고 외쳤다. 이때 감색 점퍼를 착용한 누군가가 M16 소총으로 응접실 대형 유리창을 쐈다. 홀 안으로 침입해 정 총장에게 총을 겨누고는 빨리 가자고 위협했다. 정 총장은 "그럼 가자!"라고 했다. 그는 대통령이 뭔가 오해해서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짐작했다.


*정승화 총장은 슈퍼살롱 뒷좌석에 수사관들과 함께 탔다. 우경윤 대령은 그전에 누군가의 총에 옆구리 관통상을 당하고 쓰러졌다. 정 총장이 연행된 뒤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이송됐다.


*정승화 총장 연행 과정에서 이재천 소령은 우측 옆구리에 수사관이 쏜 총탄을 맞았다. 총탄이 간을 스치고 뱃속에 박혀 출혈이 심했다. 그는 사경을 헤매다가 순천향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은 끝에 목숨을 건졌다. 총장 경호 대장인 김인선 대위도 눈 부위와 둔부, 대퇴부 등 세 곳에 심한 총상을 입었다. 바로 순천향병원에 입원했다. 두 사람은 퇴원 뒤 현역으로 복귀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성환옥 대령과 최석립 중령은 정 총장 연행에 문제가 생길 상황을 대비해 공관 밖에서 대기했다. 이들은 예정 시간보다 30분 이상 지나도 정승화 총장이 나타나지 않자 마이크로버스에 헌병 한 소대를 태우고 공관 안으로 진입했다. 최 중령은 이때 마침 정 총장과 허삼수 대령이 탄 승용차가 공관을 떠나고 있어 이를 호위하고 나섰다. 서둘러 해병대 경비대원들의 경비 지역을 빠져나갔다. 성 대령과 헌병들이 타고 있던 차는 해병대 경비대원들에 의해 포위돼 억류됐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오후 8시 즈음 정승화 총장의 부인 신유경 씨로부터 총격전과 연행 사실을 전달받았다. 그는 B-2 벙커로 달려가서 전군에 '진돗개 하나'의 비상경계령을 하달했다. 아울러 육본 전 참모의 비상 소집을 지시했다. 윤 차장은 북괴 무장 공비가 총장공관에 침투해 총장을 납치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전방부대에 북괴군의 동태를 파악해 보고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전방부대는 물론 한미 연합사령부에서조차 수상한 움직임은 없다고 답해왔다.


*윤 차장은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되물었다. "참모총장을 납치해 간 괴한이 보안사의 권정달(허삼수는 보안사 인사처장인데 정 총장에게 정보 차장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권정달로 잘못 알고 있었다) 대령과 우경윤 대령이라고요?" 그는 벙커 안으로 들어선 헌병감 김진기 장군에게 우경윤이 누구냐고 물었다. "우경윤 대령은 육본 범죄 수사 단장인데 현재 합수본부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윤 차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장난으로 단정했다. 치안본부와 서울 시경에 정 총장을 납치한 범인과 차량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비상계엄이었기 때문에 경찰지휘권이 계엄사인 육군본부에 있어 그런 명령을 하달할 수 있었다. 윤 차장은 계엄사령관 납치를 10·26 사건에 이은 최대 위기 상황으로 판단했다. 제 1·2·3군은 물론 수경사, 특전사, 육본 직할부대 등에 부대 장악 및 출동 통제 지시를 내렸다. 참모총장이 유고이니 지금부터 자기가 지휘하겠다고 했다. 더불어 상황이 지극히 불투명한 상태이므로 작전명령은 정식문서가 아닌 자신의 육성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라고 했다. 각 부대 지휘관의 소재를 파악해 보고하라고도 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윤 차장은 예하 부대 지휘관들의 소재를 조사한 결과 몇몇 장군들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제1군단장 황영시 장군은 오후 3시경에 서울에 볼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외출했는데 귀대하지 않고 있었다. 수도군단장 차규헌 장군은 준장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어 자리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심사는 이미 전날 밤 끝나있었다. 박준병 제20사단장과 제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도 자리에 없었다. 윤 차장은 육군종합행정학교장 소준열 소장에게 즉시 박준병 제20사단장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에게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자리를 비우고 있는 지휘관들이 경복궁 내 30경비단장실에 모여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벙커 내 장군들은 모두 분노했다. 윤 차장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결연한 얼굴로 진압을 다짐했다. 제20사단장과 제71방위사단장이 전두환 쪽에 가담해 서울 근교에 있는 이들 병력이 움직일 것은 확실해 보였다. 제20사단은 10·26 사건과 함께 계엄군으로 서울에 진주한 부대지만 사단 사령부와 한 연대가 종합행정학교에, 다른 한 연대가 제71방위사단에 각각 주둔해 있었다. 문제는 서울 근교에 있는 공수여단이었다. 전두환 장군이 공수단 출신이기 때문에 이들 부대의 향배가 윤 차장의 신경을 자극했다.


*윤 차장은 예하 부대를 강력하게 장악하려면 강경한 지시를 하달할 상부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행방이 묘연해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다. 신현확 부총리는 쌍방이 희생을 내지 않도록 사태를 지혜롭게 수습하라는 말만 했다. 그는 대통령이 있는 총리공관에도 직접 전화를 걸었다. 최광수 비서실장은 "지금은 각하와 통화할 수 없다"며 연결해 주지 않았다. 육본 지휘부는 돌발적 테러나 쿠데타군 공격을 막아줄 실제 병력이 수경사밖에 없어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장태완은 밤 9시가 조금 지나 사령부에 도착했다. 지하상황실에서 장세동 대령, 김진영 대령, 조홍 대령의 모습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참모장 김기택 준장으로부터 이들이 30경비단장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태완은 담배 서너 대를 연달아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내 30경비단장실에 전화를 걸어 장세동 대령을 대라고 했다. 수화기에서는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 장 장군!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이리로 와. 이리 와서 우리하고 말 좀 하자고." 장태완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참고 있던 욕설을 내뱉었다.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희 놈들 거기 그대로 있거라.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싹 깔아 죽일 테니!" 욕설에 유 장군은 쑥 들어가 버리고 난데없이 제1군단장 황영시 장군이 전화를 받았다. "장 장군! 왜 흥분하고 그래. 진정해. 그러지 말고 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와 같이 일하도록 해요." "아니 형님! 내가 정 총장님을 한 번이나 제대로 모신 적이 있습니까? 형님이 나보고 정승화 총장을 잘 모시라고까지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랬으면 형님이 잘 보필해야지, 이래서 됩니까? 정 총장님과 가까운 형님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이번 사건은 없었던 걸로 할 테니 총장님을 빨리 원상 복귀시키도록 하십시오." "장 장군!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야." "좋아, 이놈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내가 포를 갖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모두 날려버릴 테니." 황 장군은 차규헌 장군을 바꿔 주겠다고 했다. 장태완은 그 말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유학성 장군이나 황영시 장군과는 호형호제하며 지내왔으나 직속 상하관계로 근무해본 적이 없었다. 차규헌 장군과의 관계는 달랐다. 1974년부터 1년 동안 수경사 참모장으로 있으면서 사령관으로 모셨다.


*장태완은 김용휴 국방부 차관, 제3군사령관 이건영 장군, 윤성민 참모총장 등에게 협조를 구했다. 연희동 요정에서 황급히 헤어졌던 정병주 특전사령관과도 전화 통화했다. 그는 두 가지 문제를 걱정했다. "초저녁에 3군사령관 이건영 장군에게 요청한 진압 병력( 제26사단·수도기계화사단)을 장관님 승인을 받고 출동시켜 줄 모양인데 장관님이 어디 있어야지. 일설에는 장관님이 8군으로 피신해 있다는 말도 들리는데 도대체 이래 가지고서야 김일성이가 만일 남침해 온다면 6·25 때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어요." "여보! 나 조금 전에 노 장관과 통화했어. 문홍구 합참본부장한테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대뜸 '이 애들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신중을 기울여 줘. 지금 여기에는 장관님도 계신다'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노 장관이 수화기를 바꿔 들고 '너 정병주야?'' 하기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야! 너희 여단이 국방부로 쳐들어온다는데 막아다오. 지금 유학성, 황영시가 장난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시더군. 그래서 내가 '장관님! 장난하는 놈은 장관님이 가지고 있는 수사기관을 가지고 모조리 잡으십쇼'라고 말했지." "오늘 밤의 승패는 형님이 그곳 공수여단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일과 두 개 사단(26사단·수도기계화사단)이 저놈들보다 먼저 출동해서 진압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지금 그곳 여단 사정은 어떻습니까?" "박희도 장군의 제1공수여단이 출동하고 있다는 참모의 보고를 받고 박희도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없다고 하더군. 부단장 이기룡 대령에게 '너희들 사령관 지시도 없이 부대가 출동한다고 하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즉각 중지해라'라고 했더니 내 지시를 따르겠다고 했어요."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얼마 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장태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기 부사령관이 제1공수여단 출동을 만류했더니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이 "부사령관님! 저는 이미 이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라며 출동을 강행하겠다는 무전을 전해왔다고 했다. 장태완은 다음과 같이 간청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 선배님! 하나회 조직원인 제1, 제3, 제5 공수여단장들은 전두환이가 시키는 대로 하는 자들입니다. 믿지 마시고 일반 장군 출신인 윤흥기 장군의 9공수여단을 곧바로 저한테 보내주십쇼. 저는 지금 경비단장 둘과 헌병단장, 그리고 그들 휘하 병력이 전부 반란군에 가담해 본부 행정병력 한 중대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속히 좀 보내 주십쇼."


*장태완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윤흥기 장군의 제9공수여단이 제1한강교에 도착하면 바리케이드를 풀겠다고 했다. 이들을 통과시킨 뒤 다시 차단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내 한강의 전 교량을 바리케이드로 막으라고 지시했다. 이때가 밤 10시경이었다.


*장태완은 배정도 제26사단장과 손길남 수도기계화사단장, 박희모 제30사단장에게도 지원을 약속받았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육본 측에서 병력 동원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도청으로 알고 있었다.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백운택 등과 승용차 두 대에 분승하고 총리공관으로 향했다. 정승화 총장의 연행 재가를 최규하 대통령에게서 다시 받아내고자 했다. 그는 노태우 제9사단장을 30경비단에 남겨두고 상황을 파악해달라고 당부했다.


*전두환은 공관 접견실에서 동행한 장군들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한 사람씩 소개했다. 일행 중 최선임자인 유학성 장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승화 총장이 시해 사건에 관련돼있음이 분명하니 재가해 주셔야 한다고 했다. 다른 장군들도 재가해 주시지 않으면 군 지휘체계가 무너질 수 있으며, 수도권에 있는 전 지휘관들도 같은 의견이라고 거들었다. 최 대통령은 총장공관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의 경위를 따지며 불쾌해했다. 전두환에게 직접 내막을 물었다. 전두환은 "제가 결재받으러 오면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려고 보냈던 것인데, 그 과정에서 서로 오해가 생겨 총격전이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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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대통령은 전두환 측 요구를 계속 거절했다. "대통령의 결재도 나기 전에 왜 가서 그런 총격 사건이 일어나도록 했는가 말이오. 대통령 재가도 없는데 먼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위법이오. 더구나 이 결재는 전에도 말했지만, 정상적인 절차도 밟지 않고 바로 내게 가져온 것이라 나로서는 결재할 수가 없어요. 당신들 위에 국무위원인 국방부 장관이 엄연히 있는데, 그 사람들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내가 당신들 말만 믿고 국무회의에서 임명한 계엄사령관 연행을 마음대로 결재할 수 있겠소? 이건 나보고 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과 같은 소리요. 국방부 장관 의견과 사건 경위를 다 들어보고 판단해 결재할 것이니 장관을 찾아오도록 하시오."


*유학성 중장 등 합수본부 측 장군들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노 장관은 이날 저녁 육군 참모총장 공관 이웃에 있는 장관 공관에 있었다. 총소리가 나자 부인, 아들 등 가족을 데리고 공관 담을 넘어 단국대학교 체육관으로 피신했다. 노 장관은 간신히 합참 작전국장 이경율 소장과 전화 통화를 했다. 그는 이 장군 차를 불러 타고서 국방부, 육본 등 군을 지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 체포를 우려해 강북 강변로를 동서로 배회하다 여의도에 있는 이 소장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대피시켰다. 노 장관은 김용휴 국방부 차관과 통화를 나누고 밤 10시경에 국방부로 들어갔다.


*국방부로 돌아온 노재현 장관은 소수 정치 군인들 소행인 걸 알면서도 대처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수부대가 곧 국방부를 점령하러 온다는 말에 국방부는 경계가 허술하고 불안하다고 했다. 이내 참모들에게 "실 병력이 있는 수도경비사령부로 가서 해봐"라고 지시했다. 그러고선 수경사가 아닌 미 제8군 벙커로 이동했다. 얼마 뒤 다시 국방부로 돌아온 노 장관은 10시 45분 즈음 총리공관에 전화를 걸어 최규하 대통령과 통화했다. 최 대통령은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노 장관은 "그곳으로 곧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최 대통령이 간단히 전화를 끝내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학성 장군은 수화기를 넘겨받아 지금까지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내 급히 와달라고 요청했다. 노 장관은 바로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가겠다고 했다. 국방부 장군들은 지금 그곳으로 가면 합수본부 측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며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전두환은 재가를 얻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겠다고 판단해 다른 장군들보다 먼저 보안사령부로 돌아왔다. 보안사에는 전국의 움직임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통신망이 갖춰져 있었다. 육본 측에서 제9공수여단에 출동 명령을 내리고,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이 출동을 준비한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합수본부 측은 육본 측 병력 출동을 막는데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특히 보안사 통신체계를 최대한 이용했다. 육본 측 명령에 출동을 준비하는 부대 지휘관과 참모들을 설득해 실행을 와해시켰다. 설득에는 하나회 조직과 육사 동기·선후배 등의 종용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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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은 밤 10시경 한강의 전 교량을 바리케이드로 막으라고 지시한 뒤 이건영 제3군사령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출동 여부를 물었다. 이 사령관은 30사단과 33사단은 절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놓았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에 대해선 국방부 장관 허가가 떨어지면 출동시키겠다고 말을 바꿨다. 다행스럽게도 제1한강교 쪽으로 오던 제1공수여단은 민간차량들 때문에 김포 방향으로 회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교량으로든 그들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작전참모인 박동원 대령은 장태완에게 제1공수여단이 수도경비사령부 책임 밖의 지역이고 검문소도 설치돼 있지 않은 행주대교를 통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육본 B2 벙커에선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합수본부 측 장군들에게 정승화 총장을 원상 복귀시키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해 전원 체포하겠다고 경고했다. 합수본부 측 장군들은 정 총장 연행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과정에 있어 불가피한 조치라고 맞섰다. 윤성민 차장이 적법절차를 생략한 총장 연행은 불법행위이니 조사할 일이 있으면 일단 석방하고 절차를 밟아서 하라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육본 지휘부 측은 조직적 쿠데타임을 직감했다. 정 총장이 이미 살해당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육본 측은 합수본부 측에 이쪽으로 와서 경위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합수본부 측은 30경비단으로 와서 보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며 경복궁으로 오라고 맞섰다.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육본 측에선 잘못하다가는 유혈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이를 피하는 쪽으로 해결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는 진압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말았다. 윤성민 차장은 병력 출동을 자제하자고 말했다. "우리 서로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자제하자. 만일 아군끼리 대규모 충돌을 발생시킨다면 김일성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꼴이 될지 모른다. 자칫하면 서울 시내가 불바다가 되고 수많은 희생자가 날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망하게 된다. 우리 서로 병력 동원을 자제하자." 이 같은 내용은 장태완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얼마 뒤 육본 벙커에 제1공수여단이 육군본부를 공격 목표로 출동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육본은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즉각 지원받을 수 있는 수경사도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있는 30경비단과 33경비단, 헌병단 주력이 이미 합수본부 측으로 넘어가 버린 상태였다. 특전사령부 또한 제1, 제3, 제5 공수여단이 합수본부 편이었다.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이 지시 없이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했으나 제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했다. 30경비단에 있던 박희도 여단장의 명령에 따라 10시경 선두로 출동했다. 이와 관련해 합수본부 측은 훗날 육본 측에서 먼저 병력을 출동시켜 대항하려는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육본 측에서 제9공수여단을 출동시킨 건 제1공수여단보다 2시간 늦은 밤 12시경이었다.


*신월동까지 이동했던 제1공수여단은 육본 지휘부와 특전사령부의 강력한 지시에 부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육본 지휘부는 눈앞의 불안이 해소됐으나 그 병력이 언제 다시 출동할지 몰라 초조해했다. 이들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직접 전차를 앞세워 육본을 공격해온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다시 대책 회의를 열었다. 전투 병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 수경사로 집단 이동했다. 육본이 전군의 지휘 통신망을 갖춘 육본 벙커를 떠난 것은 크나큰 오판으로 평가된다.


*정승화 참모총장의 수석부관인 황원탁 대령은 육본 지휘부와 함께 수경사로 옮겨와 있던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에게 "장갑차와 전차, 그리고 병력을 조치해 주시면 제가 직접 인솔해 서빙고로 쳐들어가서 총장님을 구출해 오겠습니다"라고 결연하게 말했다. 문 장군은 장태완에게 황 대령을 지원해주라고 했다. 준비된 전차는 한 대뿐이었다. 황 대령은 한 대라도 좋으니 끌고 나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황 대령이 구출 작전을 구체화하고 있을 무렵 문 장군은 미 제8군 벙커에서 걸려 온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수경사에 모여있는 장군들이 병력 동원에 관해 협의하는 모양인데 절대 병력을 동원하지 말아요. 전두환이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원만하게 타협될 것 같소.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관련한 한 사람에 대한 문제라고 하니까 장군들에게 흥분하지 말고 있으라고 해요. 보안사령관이 무지한 인간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그리 알고들 있어요." 문 장군은 이 말을 장태완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장태완은 훗날 "이런 사실을 13년이 지나서야 처음 알았다"며 "만일 당시 내가 장관과 통화할 수 있었다면 그날 밤의 상황은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장태완은 서빙고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정승화 총장이 그곳에 감금돼 있지 않거나 이미 살해됐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설사 서빙고에 감금돼 있더라도 구출 작전을 전개하면 다른 곳으로 빼돌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모자들이 모여 있는 경복궁과 보안사령부를 공격해 이들을 체포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판단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지휘 맡긴 부하에게 체포됐다(中)

*장태완의 고심이 깊어질 무렵 헌병감 김진기 장군이 찾아와 헌병 한 소대를 차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헌병들을 이끌고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가서 대통령 각하를 모셔 오겠소." 김 장군은 1953~1954년 장태완과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함께 유학한 사이다. 그 뒤에도 특별한 우정을 나눠왔다. 장태완은 친구를 믿고 헌병 한 소대를 차출했다. 그런데 김 장군은 상황을 파악하러 나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정동호 경호실장 대리와 고명승 경호실 작전과장 등이 지휘하는 청와대 경호실 중대 병력이 총리공관에 이중 삼중으로 배치돼 대통령을 모셔 오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참고 자료 : 장태완 지음·발행처 명성출판사 '12·12 쿠데타와 나(1993)', 한국일보 정치부 지음·발행처 한국일보사 '빼앗긴 서울의 봄(1994)', 고나무 지음·발행처 북콤마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2013)', 노태우 지음·발행처 조선뉴스프레스 '노태우 회고록(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2011)', 정일영·황동하 지음·발행처 그림씨 '전두환 타서전(2017)', 정해구 지음·발행처 역사문제연구소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2011)'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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