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시상식서 男협회장이 女선수에 성추행
오랫동안 성차별 시달린 선수의 변화 요구
전 세계가 관심…글로벌 女선수들 연대 동참
"이제 우리는 그토록 원했던 축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여자 월드컵 챔피언' 스페인의 간판급 미드필더이자 대회 최우수선수(MVP)인 아이타나 본마티 선수가 24일(현지시간)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 호주·뉴질랜드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후 스페인 대표팀이 수주간 각종 논란을 겪어 마음고생 한 끝에 경기에 나설 수 있게 되자 한숨을 내쉬며 내놓은 발언이었다.
스페인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난달 월드컵 이후 홍역을 치렀다. 지난달 20일 시상식에서 남성인 루이스 루비알레스 스페인 축구협회장이 우승 세리머니 중 여자 선수에 강제로 입맞춤한 것이 논란이 됐다. 전 세계인의 시선이 주목된 시상식에서 성범죄가 벌어지자 그동안 여자 축구 선수뿐 아니라 여자 스포츠인이 겪어야 했던 성차별 이슈가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건 이후 루비알레스 회장은 사퇴했고 대표팀 감독도 기존 호르헤 빌다 감독이 경질, 몬세라트 토메 첫 여자 감독이 임명됐다. 스페인 축구협회가 변화를 하는 듯 보였지만 이 과정에서 선수들은 협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며 A매치 보이콧을 선언하며 버텼다. 결국 협회 개혁을 위한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면서 선수들은 다시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BBC방송에 따르면 지난 22일 스웨덴과의 경기를 치른 본마티 선수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스포츠나 사회적 차원에서 본보기를 만들고 있다"며 "처음 며칠은 너무 복잡했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강제 입맞춤은 '일부'…투쟁은 1년 넘게 이어졌다
강제 입맞춤 사건 이후 스페인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지난 1년여간 겪었던 일이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됐다. 루비알레스 회장의 강제 입맞춤은 협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성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수십 년 동안 스페인 축구계에서 여자 선수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이 이제서야 드러난 것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6일 10여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선수를 비롯한 스페인 축구 관계자들이 가부장주의부터 언어폭력까지 여러 성차별을 겪어야 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빌다 감독이 선수들에 취침 시간을 보고하고 밤에는 호텔 방을 열어두고 자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또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도 코치진의 감시 속에 하라고 했다고 한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컨트롤하겠다는 것이 빌다 당시 감독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협회에서 성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일도 허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스페인 축구협회에 청렴 부회장직을 맡아 들어갔던 아나 무뇨스는 2019년 입사 1년 만에 사임했다면서 자신에게 별다른 권한 없이 그저 여성 임원이 있다는 사실을 홍보하기 위해 채용했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장식품' 또는 '화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한 경기가 끝난 이후 협회가 여자 선수들에게 상금 대신 태블릿 PC를 줬다는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루비알레스 회장이 "나는 딸이 있다. 여자들이 뭘 원하는지 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설명했다.
스페인 축구계에서 성추행과 성희롱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번에 경질된 빌다 감독 이전에 20년이 넘게 여자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이그나시오 케레다는 여자 선수들에게 "너에게 진짜 필요한 건 좋은 남자와 큰 성기"라고 말하곤 했다는 경험담이 소개됐다. 지난달 20일 잉글랜드와의 결승전에서 스페인이 선취 득점에 성공하자 빌다 감독이 옆에 있던 여성 코치진을 끌어안으며 가슴을 만지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NYT는 선수들이 이러한 일련의 일을 두고도 보복을 우려해 공개 발언하는 걸 꺼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NYT는 이번 스페인 선수들이 월드컵 우승을 거둬들인 것을 두고도 '빼앗긴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스페인 선수들이 월드컵 우승을 위해 수년간 노력해왔고 어렵게 목표를 이뤄 시상식에서 그 순간을 즐겨야 했지만, 성 추문으로 축하받기 보다는 논란에 휩싸여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 달 가까이 협회와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고 결국 중요한 변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끌어내 큰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지한다" A매치 상대인 스웨덴 선수도 '연대'
여자 선수들이 겪는 이러한 성차별적인 대우는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이나 독일 등 현재 축구 강국이라 불리는 유럽의 강대국에서 여성 축구 경기는 금지됐다. 2004년 제프 블래터 당시 FIFA 회장은 "여자 선수들이 핫팬츠를 입고 경기하면 축구의 인기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시대적으로 성평등이라는 가치가 주목받으며 이러한 상황이 서서히 개선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스페인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성추행 사건으로 전 세계가 다시 한번 스포츠계의 성차별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스페인의 이러한 사정에 공감하는 다른 국가의 여자 선수들은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지난 22일 스페인과 A매치 대결한 스웨덴의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스페인 선수들과 연대했다. 스페인 선수들이 킥오프 전 기념 촬영을 할 때 '우리의 싸움은 세계적인 싸움이다(Our fight is the global fight)', '끝났다(#SeAcabo)'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팔찌를 착용하고 사진 촬영을 하자 스웨덴 선수들도 동참해 뜻을 함께했다.
스웨덴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미드필더인 필리파 앙겔달 선수는 경기 전인 지난 19일 기자회견에서 스페인 선수들이 보이콧하겠다고 한다면 그를 지지할 것이라며 "그들(스페인 선수)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지지를 받고 있고 다른 국가에서도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잉글랜드 여자 축구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한 여자 축구의 간판스타 레아 윌리엄슨 선수도 최근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지지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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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UN) 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에 온 그는 "축구계가 보여온 환경을 고려하면 피할 수 없는 순간"이라면서 "그러한 상황이 알려지게 돼 동료 축구 선수로서 이들(스페인 여자 선수)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어떠한 선수도 그들이 겪고 있는 일을 겪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바로 내가 젊은 여성의 여건 개선을 위해 발언할 기회를 잡으러 유엔에 온 이유"라고 덧붙였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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