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충실의무 범위를 '주주'로 확대하는 방안
주주행동주의 거세 회사와 소액주주 갈등 증가
정치권, 내년 총선 앞두고 개미투자자 표심 잡기 나서
금융투자업계 환영, 재계는 강력 반발
#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8일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 추진을 약속했다. 이날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 카페에서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 김고은 알테오젠 소액주주연대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한 '천사백만 개미투자자 권익 보호를 위한 일반주주-민주당 간담회' 자리에서다. 이재명 대표는 "회사 이사들이 주로 구성 과정, 역할, 최종 책임에서 대주주들에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소액주주들이 회사의 의사결정이나 업무 집행에서 배제된다"라고 비판했다.
#2.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용우 의원이 "상법 개정안의 취지와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법률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보호하도록 하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획기적인 법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뜻밖의 답을 했다. 특히 "개정안의 방향에 공감하며, 현재 법무부에서 운영 중인 상법 특별위원회에서 물적분할 관련 제도 개편 등 상법 시행령 개정안 등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호응했다. 한동훈 장관은 다만 "소액주주를 보호하겠다는 생각은 같으나 법리적으로 어떻게 할지 건설적으로 준비하겠다"라고 덧붙였다.
1년여 잠자던 상법 개정안 논의 속도 내나
현행 상법의 '이사의 충실의무'(제382조의3) 조항에 회사의 이익뿐 아니라 '주주의 비례적 이익'까지 포함하도록 하는 내용 등이 핵심인 상법 개정안 논의에 속도가 붙을지 주목된다. 한동훈 장관이 부처 차원에서 상법 개정 취지에 공감의 뜻을 나타냈고, 이재명 대표도 입법에 공개적으로 힘을 실었다. 올해 주총 시즌 내내 주주행동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내년 총선도 앞두고 있어 개미투자자의 표심을 잡으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20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사의 충실의무를 규정한 상법 382조 개정안은 두 건 발의돼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이용우 의원과 박주민 의원의 법안이다. 둘 다 발의된 지 1년이 넘도록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이 의원 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의 비례적 이익과 회사’로, 박 의원 안은 ‘회사와 총주주’로 바꾸는 게 핵심이다. 모두 이사회 이사들이 경영적 판단을 할 때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회사 피해 없어도 주주 이익 침해하면 소송 가능
개정안이 이대로 국회를 통과하면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무엇보다 이사회의 경영적 판단으로 주주에게 손실이 발생하면 주주들이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전환사채(CB) 발행, 합병, 분할, 지주사 전환, 자사주 매매, 공개매수 등 모든 자본거래 때 회사의 피해는 없더라도 주주의 이익을 편취했다는 결론이 나면 법정에서 다툴 수 있다.
물적분할 상장도 위법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물적분할은 기존 회사에서 법인격을 분리해 신설 회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LG화학이 배터리 사업을 분할해 지분 100%를 소유한 LG에너지솔루션을 만든 게 대표적 사례다. 기존 회사가 신설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는 게 특징이다.
상법 제418조는 기존 주주들의 주식 수에 따라 비례적으로 신주를 인수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행법은 신주인수권 규정을 위반하지도 않고, 회사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 물적분할을 문제 삼지 않는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적분할도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대법원 "이사에게 주주 보호 의무가 없다"
현재 주주가 손실을 보더라도 처벌이 불가능한 건 죄형법정주의 원칙 때문이다. 법 조문에 범죄가 규정돼야 처벌할 수 있다. 현행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로 규정하고 있다. 주주들이 이사회 결정으로 피해를 입어도 법정 다툼이 어렵다는 의미다.
특히 2004년 5월13일 대법원은 "이사에게 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선관·충실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일명 '가장납입' 판례다. 이는 대법원이 처음으로 '이사에게 주주 보호 의무가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서 선례가 되고 있다. 당시 A사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로 신주를 발행했다. 회사는 증자대금이 들어오자 즉시 돈을 빼서 대표이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돌려줬다. 결과적으로 증자로 제3자만 지분을 확대한 셈이다. 기존 주주들의 지분 가치는 희석되고 주주들 사이에 부의 이전이 발생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자산 손실이 생기지 않았다.
심혜섭 한국거버넌스포럼 변호사는 "삼성물산 합병 판결에서도 합병비율 불공정과 관련해 이사의 책임을 부정하면서 2004년 '가장납입' 판결을 인용한 바 있다"라고 말했다.
개정안 논의가 진전될 조짐이 보이자 재계는 반발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법으로 규정한 사례가 없다"라며 "회사와 주주의 법인격을 별개로 보고 있는 상법 체계를 흔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추가하면 회사와 주주가 동일하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도모하는 취지는 좋으나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 관계자는 "회사와 주주 간 이해가 충돌하거나 소액주주 간 이해가 충돌할 경우 이사회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주식회사는 물적회사이므로 지분율이 높을수록 이해관계도 크다"라며 "소액주주가 다수라는 이유로 (이들을 위한 방향으로) 상법을 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美 델라웨어 회사법, 주주 보호 명시…日 법 해석으로 주주 보호
1년 넘게 방치된 상법 개정안이 주목을 받은 것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대정부질문 발언이 계기다. 한 장관은 "(개정안) 방향에는 공감한다"라며 "소액주주를 보호하겠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생각이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 장관이 대정부질문에서 언급한 델라웨어 회사법 제102조 사례를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델라웨어 회사법 102조 (b)항에서는 '회사 또는 회사의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위반했을 때는 이사의 책임을 감면해주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은 각 주마다 경제자치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회사법도 주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델라웨어 회사법은 회사 설립에 유리하기 때문에 미국 주요 상장사의 절반 이상이 이를 준거법으로 삼고 있다.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델라웨어 회사법은 이사의 충실의무와 관련해 회사와 주주를 병기하고 있다"라며 "주주 역시 의무와 책임의 상대라는 점을 법 조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법 조문에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대륙법 전통이 강한 점은 한국과 비슷하다. 다만 법 해석에서 주주 보호에 더 적극적이다. 이상훈 교수는 "기업 합병, 분할, 공개매수 등 회사와 주주의 의견이 대립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일본은 법 해석에서 '회사의 이익이란 곧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주주에 대한 의무를 강화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는 주주 권익을 명문화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상법 개정안을 지지하고 있다. 이번 주총 시즌에서 나온 주주제안 내용은 대부분 배당금 확대, 자사주 소각, 감사위원 선출 등이었다. 회사에 단체법적으로 귀속돼야 할 이익 중 소액주주의 몫(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보장해달라는 의미다.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투자자 보호 방안은 자본시장법에 근거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라며 "상법에서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로 제한하기 때문에 불공정 합병, 인적분할·물적분할 등 소액주주의 피해가 발생할 때 법적으로 다투려면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정부·여당, 상법 개정보다 사안별 특칙 선호
다만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개정에 별다른 의견이 없는 상황이다. 법무부보다 소극적인 입장이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여당에 상법 개정안 논의를 제안했지만 아직 답변을 못 받았다"라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은 상법 개정보다 이슈가 발생하는 사안에 특칙을 만드는 방향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LG화학의 물적분할 이슈가 불거진 후 윤석열 정부는 상법 개정 대신 물적분할에 반대하는 주주에게 주식매수청구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소액주주·금투업계와 재계의 이해가 크게 엇갈리는 만큼 상법 개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국내 자본시장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윤주 기자 h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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