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행복감을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자. 그들은 우리들의 영혼을 꽃피우는 멋진 정원사들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더 고마워해야 할 이들은 우리에게 무관심하거나 냉혹하게 대했던 여인들이며, 또는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잔인한 친구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심정을 조각조각 내어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다. 나무줄기 채 통째로 뿌리 뽑아버리고, 자잘한 가지들마저 쳐버린 그들은 마치 수확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질 좋은 씨앗을 몇 개 뿌려놓았던 모진 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커다란 불행을 가려주고 있었던 소소한 행복들을 모두 부셔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고 헐벗은 황야로 만들면서,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라고 부추긴다. 슬픈 연극들도 우리에게 유사한 자선을 베풀어준다. 희극은 우리의 허기를 채워주는 대신에 잠시 잊게 할뿐이기에, 재미있기만 한 작품들보다 비극이 한 수 위인 셈이다. 인간을 양육하는 빵이란 그 맛이 쓰디쓴 법. 삶이 만족스러울 때에는 인간의 운명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데, 이해관계가 이를 가리고 있거나 욕망에 의해 변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고통 때문에 혼미하거나 또는 극장에서 비장한 감정에 빠져있을 때에는, 극중 인물의 운명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의 운명은 우리가 이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는 본분과 진실의 영원한 말씀을 경청하게 시킨다. 진정한 비극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고통 받는 이들이 바로 그곳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단지 들으라고 강권한다.)의 그 억양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아아! 감정은 변덕스러워 주었던 것을 도로 빼앗아 가는데, 기쁨보다 고귀한 슬픔이라지만 그 효력은 지속되지 않는 법. 아침이 오면 어제 밤 우리를 그토록 고양시켜 혜안 있고 진정어린 동정심을 가지고 우리네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게 했던 그 비극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어쩌면 꼬박 일 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어느 여인의 배반이나, 친구의 죽음을 위로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꿈이 산산이 깨지고 시들어버린 행복이 흩어지는 와중에, 눈물이 소나기 되어 내릴 때 바람은 튼실한 씨앗을 뿌려주었으나, 싹을 틔우기에 눈물은 너무 일찍 말라버리기 때문에.
-마르셀 프루스트,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이건수 옮김, 민음사, 1만3000원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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