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송화정 기자, 심나영 기자] 레고랜드 사태로 신용경색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용스프레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치로 치솟았고 채권시장은 자금이 말라붙어 우량 등급 회사채도 미매각이 속출하는 등 ‘돈맥경화’ 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일 시장 안정을 위해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정상화 유예, 채권안정펀드 가동 등의 조치를 내놨지만 이미 시장 상황이 악화일로여서 선제적으로 대응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원도 레고랜드 개발 관련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최종 부도처리 된 게 사태가 지난 4일이었는데 보름간 정부와 금융당국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채 모니터링 강화만을 얘기했다. CP 시장에서는 한 달 전 연 3~4%였던 ABCP 금리가 7%로 오르고 한때는 차환발행이 안 되는 등 발작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회사채 시장에서는 연초부터 정부의 LCR 정상화로 은행들이 대규모로 은행채를 찍어냈고 한국전력은 지속된 적자로 인해 올해 들어 18조원의 한전채를 발행했다. 이들 우량채의 대규모 발행으로 채권시장 자금을 빨아들이자 나머지 회사채들은 발행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21일 금융시장에서는 정부의 선제적 조치가 없어서 화를 키웠다는 지적과, 추가 조치를 빨리 시행해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시급한 건 채권안정펀드 규모를 더 늘려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를 매입, 유동성을 공급해줘야 한다는 거라는 데 이견이 없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20일 채권시장 안정화 조치로 금융위가 1조6000억원 규모의 채안펀드를 풀겠다고 했지만 21일 채권금리가 오히려 더 올랐다. 이 정도 규모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게 시장 컨센서스"라며 "금융지주회사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캐피털 콜의 규모를 늘려 금융위가 어느 정도 자금을 시장에 더 투입할 수 있는지 명확한 시그널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본격적으로 단기자금 시장이 안 좋아진 게 한 달 정도 됐는데 당국에서 모니터를 해왔다면 조금 더 빨리 시장안정 조치를 취했으면 시장 불안을 이렇게 증폭시키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기업들 자금조달 '비명'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채권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우량 회사채도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17일 1000억원 규모의 공모채 수요예측을 진행한 JB금융지주는 만기 2년물에 800억원, 3년물에 200억원의 자금 모집을 계획했으나 수요예측 결과 2년물 230억원, 3년물 150억원 등 총 380억원에 그쳤다. 같은 날 300억원 규모의 공모채 수요예측을 실시한 한진도 10억원이 모이는 데 그치며 대량 미매각이 발생했다. SK리츠 회사채는 960억원 모집에 910억원의 주문만 들어왔고 메리츠금융지주, SK렌터카도 주문을 다 채우지 못했다. AAA급의 공사채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지난 17일 한국전력공사는 연 5.75%와 연 5.9% 금리를 제시하고 총 4000억원 규모의 채권(2~3년물)을 발행하려고 했으나 1200억원어치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유찰됐다. 한국도로공사도 같은 날 1000억원 규모의 채권(2년물)을 발행하려 했으나 전액 유찰됐다. 지방자치단체 산하 AA등급의 우량 공기업인 과천도시공사는 19일 6.2% 금리에 발행하려던 600억원어치의 채권이 전액 유찰됐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3분기에 총 16건(9500억원)의 미매각이 발생해 미매각률이 14%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13%포인트 상승한 수준이다. 특히 A등급에서 8건(6500억원)의 미매각이 발생해 58%의 높은 미매각률을 기록한 것으로 조사됐다.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의 자금조달이 갈수록 힘겨워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회사채(AA-, 3년물)와 국채 간 금리 차(스프레드)는 지난 14일 1.14%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였던 2009년 9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회사채와 국채 간의 금리 차가 벌어진다는 건 그만큼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한민 한국은행 금융시장국 차장은 "금융시장 불확실성 고조로 신용도와 유동성이 낮은 신용채권에 대한 위험프리미엄에 크게 증대되면서 투자 수요가 위축됐다"면서 "또한 신용채권 발행물량이 올들어 특수채·은행채 등 초우량물 중심으로 크게 확대되며 시장 내 수급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특히 올해 늘어난 신용채권 발행의 대부분이 AAA 등급에 집중되면서 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신용채권 수요를 제한하는 요인이 됐다"고 덧붙였다. 올해 1~9월 중 AAA 등급 신용채권의 순발행액은 총 48조원으로 전체 신용채권 순발행액의 96%에 달했다.
한전채·은행채 자금 블랙홀
특히 한전채와 은행채가 대거 자금을 빨아들였다. 한은에 따르면 한전채는 올해 1~9월 중 18조3000억원이 순발행됐는데 이는 전체 신용채권의 36.7%에 달하는 수준이다. 한전은 대규모 적자로 운영자금 부족을 메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채권을 찍어내고 있다.
은행채도 올들어 역대 최대 수준으로 발행이 불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20일까지 은행들의 은행채 발행액은 168조 6490억원으로 지난해 연간 발행액(183조 2123억원)의 92.1%에 달했다. 지난 4월 10조4700억원이었던 은행채 발행액은 지난 7월 올해 들어 최대인 24조 7100억원까지 치솟았다. 지난달에는 25조 8800억원을 기록해, 월별 역대 최대 기록을 썼다.
이로 인해 은행채(무보증·AAA) 5년물 금리는 19일 기준 5.286%를 기록했다. 2010년 2월 24일(5.24%) 이후 약 12년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5.2%대에 올라선 것이다. 단기물 금리도 덩달아 급등했다. 같은 날 은행채(무보증·AAA) 6개월물 금리는 4.117%를 기록했다. 6개월물 금리가 4%를 넘어선 것은 2009년 1월 7일(4.12%) 이후 약 13년 만이다.
신용등급 AAA급인 시중은행들이 발행하는 채권인 금융채가 시중자금을 최근 들어 싹쓸이한 이유는 자금 조달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첫 번째로는 금융위에서 요구한 유동성커버리지(LCR)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 두 번째는 환율상승으로 인한 장외파생상품 거래의 변동성을 해지하기 위해서 조달 규모를 확대해야 했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은행이 자금 조달 규모를 확대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은행채를 찍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의 결과로 채권금리가 올라가며, 시장이 불안정해지고, 다시 대출금리까지 뛰게 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시중은행들이 LCR 비율을 맞추려고 은행채를 발행하면, 지금 회사채 시장이 경색돼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신용도가 높은 은행채에 몰리게 돼 자금 블랙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은행채 대규모 발행 → 채권금리 급상승 → 은행 여·수신 금리인상 고리가 시장 상황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시중은행이 돈 먹는 하마처럼 유동성을 빨아들이고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까지 터지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발을 담근 제2금융권 자금 조달 어려움까지 심해졌다.
이경록 신영증권 연구원은 "국내외 기준금리 인상, 금리변동성 확대, 환율급등과 경기침체 우려 등으로 신용채권 투자심리가 얼어붙었고 금리인상 기조와 부동산 PF의 부실 우려로 단기자금시장이 특히 어려웠던 상황에서 레고랜드 사태 이후 단기자금시장이 급격히 악화됐다"면서 "한전채의 대규모 발행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은행들도 여러 이유로 인해 자금조달에 애쓰고 있고 부동산 PF 보증이 많은 증권사들도 선제적 자금확보가 필요한 상황으로 기업을 넘어 금융기관까지 현금확보가 우선시 되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금융시스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송화정 기자 pancake@asiae.co.kr
심나영 기자 sny@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