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권력 동원, 심의 제한없어
습관화땐 경제 부작용 우려
전문가 "화폐 가치 떨어지면 물가상승 유발·통화가치 불안"
[아시아경제 장세희 기자]한국은행의 발권력이 주목받는 것은 정치권에서 대선을 앞두고 한은의 역할 확대를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재정의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통화가치 불안 등 경제적 우려뿐 아니라 중앙은행의 독립성 훼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은행 독립성 침해·인플레 부작용"= 15일 전문가들은 발권력 동원은 심의 등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습관화되면 경제적 부작용이 곳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치권에서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되면서 물가 상승(인플레이션), 금융시장 불안 등을 촉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4월부터 6개월째 2%대 상승률을 이어오다 10월 들어 3%대로 더 높아졌다. 문제는 코로나 회복 과정에서 공급 측에 이어 수요 측 물가 상승 압력이 더욱 커질 것이란 점이다.
화폐가치가 하락하면 실물자산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발권력을 동원하면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물가가 전체적으로 상승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국제금융시장에서 환율의 변동성이 심해지면 원화가치에 대한 판단도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물가 변동이 과도하면 경제 주체들은 제품의 가치산정 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투자 자체를 미루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또 화폐 가치가 흔들리면 외국인 투자자금이 유입되지 않을 수 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권에서 쓰고 싶을 때마다 발권력을 동원하면 과정 자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부채의 화폐화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나빠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29년에 국가채무가 2000조원을 넘을 전망이다.
◆전체의 90% 이상이 금융중개대출=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실이 한은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한은의 원화대출금(39조9325억원) 중 94%가 금융중개지원대출인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중개지원대출은 한은이 연 0.25%의 낮은 금리로 은행에 자금을 공급해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의 대출을 지원하는 제도다. 2018년 14조859억원이었던 금중대는 2019년과 지난해 15조5684억원, 32조5123억원으로 각각 증가했다. 한은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가 불거지면서 규모가 크게 증가한 영향"이라며 "금융중개지원대출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며 "한은법에 대출규모의 상한 등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발권력 동원은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의 결정뿐 아니라 국민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권에서 중앙은행의 역할 확대를 주문하면서 한은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실물만 보유하려고 할 것" 이라며 "정상적인 공급과 수요에 따라 화폐가치가 형성되지 않으면, 결국 시장에서 돈이 흐르지 않게 된다"고 밝혔다. 또 다른 한은 관계자는 "선거 공약으로 넣을 순 있겠지만 실제로 동원하진 못할 것"이라면서도 "만약 발권력을 동원할 경우 한은 총재가 직을 걸고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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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은 2016년 당시 청와대와 정부의 ‘한국형 양적 완화’ 요구에 대해 반대입장을 밝힌 바 있다. 윤면식 당시 한은 부총재는 "기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국책은행에 자본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며 "발권력을 활용하려면 국민적 합의 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가능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세희 기자 jangsa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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