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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한라山神은 왜 산천단으로 내려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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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약동과 제주 산천단 곰솔

청백리 상징 제주목사 이약동, 제주 백성의 목숨을 앗아가는
백록담 산신제 산행 안타까워 마을서 산신 머물 나무 찾기로
신령스러운 비경 산천단 곰솔숲 가운데 제단 차려 안전 봉행
나무는 곁에 있어줄뿐 아니라 '더불어 산다는것' 의미 돼새겨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한라山神은 왜 산천단으로 내려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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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가 필요한 까닭이 미세먼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로 입과 코를 막았지만, 올해에는 미세먼지가 아니라도 마스크가 필요하게 됐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앞다퉈 몸을 가리는 일에 나섰다. 몸을 둘러싼 외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나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는 시절이다. 심지어 가까운 동무들 만나는 일조차 경계해야 한다.


"우리 몸은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왜냐하면 몸은 생물학적 과정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분해되기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숨을 쉬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스스로의 '내부 성소(聖所)'로 들여놓는다."


법의생태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학문의 선구자로 알려진 영국 태생 퍼트리샤 월트셔가 최근 내놓은 화제작 '꽃은 알고 있다'의 한 대목이다. 살아 있다는 건 내 몸 안과 밖의 끊임없는 교환으로 이뤄진다는 얘기다.


나무를 지금 다시 바라보게 되는 건 그래서다. 한 곳에 뿌리박고 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많은 생명체를 자기 품 안으로 불러들이고, 끊임없이 다른 생명과의 교호 과정을 통해 살아가며, 마침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로 살아남는 나무를 바라보며 '더불어 산다는 것'의 참뜻을 생각하게 된다.


나무는 때를 가리지 않고 다른 생명과 가진 것을 나눈다. 모든 나무는 빛과 공기와 물을 모아 광합성을 해서 꿀과 꽃밥을 가득 담은 꽃을 피워 다른 생명에게 나눠주고 그의 힘을 빌려 혼인을 이루고, 번식에 성공한다. 나무는 천생 다른 생명과 더불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생명체다. 여기에는 물론 사람도 포함한다.


농경문화 시절에 나무는 사람과 한몸이었다. 때로는 오랜 동무처럼, 혹은 마을의 늙은 할배나 할매처럼 다정한 대상이었다. 또 나무는 사람살이를 더 풍요롭고 평안하게 하는 경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나무는 언제나 사람 곁에 있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나무에 다가서려 했으며, 사람이 미처 할 수 없었던 일을 나무에 기대어 이루고자 했다.


나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오백년 전쯤 제주에서도 그랬다. 그때까지 제주 사람들은 제주의 살림살이를 이어갈 수 있는 건 모두가 한라산신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든 눈이 오든, 풍년이든 흉년이든 제주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한라산신에게 고마워했다. 사람들은 한라산신께 해마다 한 번씩 제를 올렸다. 정성껏 마련한 제수용품을 이고진 채 산신제를 올리기 위해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랐다.


그게 음력 정월이었다. 제주도는 바람이 많아서 한반도의 여느 지역 못지 않게 겨울 추위가 사나운 섬이다. 백록담 오르는 길은 더 그렇다. 등산로가 잘 정비된 요즘도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눈보라 몰아칠 때에는 일쑤 등반을 금지해야 할 만큼 험한 길이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한라山神은 왜 산천단으로 내려왔을까 한라산신이 제주민들의 살림살이를 돌아보기 위해 산에서 내려와 잠시 머무르던 산천단 곰솔.


사람을 위한 길이 제대로 나 있을 리 없던 옛날에 백록담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고역이었을 게다. 사나운 날씨를 무릅쓰고 백록담에 오르려면 지쳐 쓰러지는 사람은 물론이고 때로는 몰아치는 한파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흔치 않았다.


조선 성종 때 제주목사(牧使)로 부임한 마흔다섯의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1416~1493)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조선의 야사(野史) 총서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청백리의 상징으로 기록에 남긴 인물이다.


이약동은 제주목사 시절에 쓰던 사냥 채찍 하나조차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관아의 벽에 걸어두고 떠났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약동의 채찍을 보물처럼 간수해 새로 부임하는 목사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그가 제주에서 돌아나올 때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약동이 탄 배가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와서는 빙빙 돌기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사공들이 겁을 먹었으나 이약동은 꼼짝않고 바로 앉아 있었다. 비장(裨將) 한 사람이 이약동에게 "섬 백성이 공의 덕에 감사하여 금으로 만든 갑옷 한 벌을 지어 훗날 공께서 갑옷 입으실 날에 드리라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약동이 비장에게 곧바로 금갑옷을 바다에 던지게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항해했다.


사람들은 이약동의 배가 빙빙 돌던 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 불렀다. 나중에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그대로 인용한 이야기다.


제주에 처음 부임한 이약동에게 먼저 눈에 띈 것은 제주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치르면서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한라산신제였다. 평안히 살기 위한 산신제가 오히려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가 되는 걸 이약동은 견딜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을 궁리하던 그는 하늘이나 산 깊은 곳에 머무르는 산신은 사람살이를 살피기 위해 필경 사람의 마을에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시로 마을에 내려와 사람살이의 사정을 살피리라 판단한 것이다. 사람의 마을에서 한라산신이 머무는 곳은 단연 크고 맑은 나무 위였다. 이약동은 한라산신이 머물 만한 신령스러운 나무를 찾아 나섰다.


오랜 탐색 끝에 찾은 나무가 지금의 산천단 곰솔 숲이다. 높지거니 솟은 곰솔이 무리지어 서 있는 이 숲이야말로 한라산신이 머무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나무로 보였다. 이약동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올리기로 결정하고 곰솔 숲 한가운데에 제단을 차렸다. 그때가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부임한 첫해, 조선 성종 원년인 1470년이다.


산천단은 융융한 여러 그루의 곰솔을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숲이다. 이약동이 산천단을 지은 오백여년 전에도 이곳은 아름다운 숲이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당시 이곳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소림천(小林泉)이, 인근에 소림사(小林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절집이나 샘의 흔적은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당시 한라산신이 머물던 곰솔은 더 높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언제라도 산신이 내려온다면 머무르기에는 더없이 알맞춤한 숲이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한라山神은 왜 산천단으로 내려왔을까 한라산신이 제주민들의 살림살이를 돌아보기 위해 산에서 내려와 잠시 머무르던 산천단 곰솔.

사람들은 이제 목숨 걸고 백록담까지 오르는 무모한 산행을 하지 않아도 됐다. 결국 산천단은 이약동이 제주 백성을 위해 베푼 여러 선정(善政)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상징이 됐다. 물론 제주목사 이약동의 선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가 제주목사로 지내던 내내 이어졌다.


그가 제주를 떠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천단의 흔적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다 제단조차 사라지고 나무들만 남아 옛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약동과 산천단의 사연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건 1997년의 일이다. 그때 곰솔 숲의 공터에서 이약동이 건립한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禪碑)'가 발굴돼 옛 사정을 드러낸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제주 산천단 곰솔군'은 모두 여덟 그루의 곰솔로 이루어져 있다. 곰솔 외에 주변 풍광을 아름답게 만드는 여러 그루의 팽나무와 멀구슬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의 정경이 싱그럽다.


곰솔은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고 그 가운데 널찍한 공간이 있다. 옛 사람들이 제를 올리기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울타리 안쪽 깊은 곳에는 산신제를 올리던 돌 제단이 세월의 풍상 따라 푸른 이끼를 얹은 채 가만히 누워 있다.


제주 산천단 곰솔 여덟 그루는 규모만으로도 대단하다. 곰솔들 가운데 가장 큰 나무의 키는 무려 30m나 치솟아 올랐다.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도 4m가 넘을 만큼 우리나라의 모든 곰솔을 통틀어 가장 큰 나무에 속한다. 울타리 한쪽에는 산천단을 이곳에 세운 이약동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나무는 그저 사람의 곁에 말없이 서 있을 뿐 아니라 사람살이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이야기의 기둥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고맙기만 하다.


나무 없이 살아간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결코 허튼 말이 아니다. 나무는 오래전부터 사람의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살이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고마운 생명체다.


바깥 세계와 철저한 차단만이 내 삶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강고한 수단이 된 요즘, 우리 곁의 나무를 바라보며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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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칼럼니스트·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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